“내가 죽인것과 마찬가지…” 오승근이 최근 공개한 김자옥과의 충격적인 마지막 대화 내용

오승근 씨는 1951년 12월 20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1968년, 홍순백 씨와 함께 트웨이스를 결성하여 데뷔했죠. 그러나 1971년 홍순백 씨와 결별하고 영에이스라는 그룹사운드에서 활동하다가 군 입대로 잠시 활동을 중단하게 됩니다. 1974년 군 복무를 마치고 임용재 씨와 함께 금과 은이라는 그룹을 결성했습니다. 오승근 씨가 금이었고, 임용재 씨가 은이었습니다. 당시 국어 순화운동의 영향으로 우리말로 그룹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때 “빗속을 둘이서”라는 곡이 큰 인기를 끌었고, 이어서 발표한 “처녀 뱃사공” 역시 크게 히트했습니다.

이 노래는 원래 황정자 씨의 곡이었지만, 금과 은이 리메이크한 후 원곡보다 더 큰 인기를 얻었죠. 이 노래로 연말 MBC 10대 가수상 등을 휩쓸었습니다. 금과 은이 1980년에 해체된 후, 오승근 씨는 솔로로 전향하게 됩니다. 솔로 활동을 시작한 후, 이혼을 겪었고, 1984년 이혼 경험이 있던 김자옥 씨와 재혼하게 됩니다. 이쯤에서 고인이 된 김자옥 씨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김자옥 씨에 대한 추억을 잠시 떠올려 보겠습니다.

김자옥 씨는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나 2남 1녀 중 셋째였습니다. 아버지 김상화 씨는 중앙극장의 고문 역할을 하며 동시에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독한 낭만주의자로, 가정경제에는 무관심하고 오로지 음악회에 다니고 시를 쓰는 데만 열중했습니다. 그로 인해 이북 출신으로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가 식당 일을 하며 살림을 꾸렸습니다. 젊었을 적 엄청난 미인이었던 어머니는 심지어 남편의 바람까지도 참고 견디며 자식들에게 하소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가정 불화로 인해 김자옥 씨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고, 우울하고 내성적인 아이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20대까지도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40대 후반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자, 배우가 된 김자옥 씨는 실질적으로 집안경제를 책임지게 됩니다. 그녀는 20대에 온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당시 배우는 그렇게 돈을 많이 벌지 못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겉으로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지만,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아파 누워 계시고 어머니는 한숨만 내쉬는 우울한 환경에서 20대를 보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밖에서는 마냥 밝고 행복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김자옥 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아동극에 출연하며 연기 생활을 시작했고, 배화여중 1학년 때부터 배화여고 2학년 때까지 아역 배우로 출연했습니다. 성인 배우로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인 1970년 MBC 텔레비전 탤런트 시험에 합격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MBC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다가 그만두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면서 잠시 브라운관을 떠났습니다. 1년 뒤인 1971년, KBS에 스카우트되면서 본격적인 텔레비전 배우로 데뷔해 1년 만에 정상급 배우로 자리 잡았습니다. 붙임성 있고 상냥한 성격 덕분에 동료들 사이에서 귀염둥이로 통했던 김자옥 씨는 1970년대 TV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안방극장의 트로이카 중 한 명으로 활약했습니다.

그녀는 주로 드라마에 많이 출연했지만, 영화에서도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였고, 흥행 기록으로만 보면 당대 트로이카였던 정윤희 씨와 유지인 씨를 능가하는 기록을 보유했습니다. 또한, 목소리가 좋아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도 오랫동안 진행했습니다. 데뷔 때부터 외모뿐만 아니라 연기력까지 인정받으며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린 탑 여배우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낭만주의적 기질을 닮아 사랑 지상주의자였습니다. 김자옥 씨는 돈보다 사랑을 쫓는 사람이었고, 당시 신인이었던 최백호 씨와 1980년 결혼을 결심합니다. 그러나 성격 차이로 인해 3년 만에 이혼하게 되었죠. 그 후 이혼한 김자옥 씨는 가수 오승근 씨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오승근 씨와 김자옥 씨는 명동의 한 미용실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유지승 씨의 주선으로 식사 자리를 가지며 인연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들의 사랑은 금방 스캔들로 퍼졌고, 김자옥 씨는 솔직하게 결혼을 결심, 만난 지 3개월 만에 재혼하게 됩니다.

이때 오승근 씨는 전처와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고, 결혼한 지 4년이 지나도록 오승근 씨와 김자옥 씨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았지만, 간절한 기도 끝에 아들을 낳게 됩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연예계 대표 원앙 부부로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1990년대 이후 김자옥 씨는 예능 프로그램에도 종종 출연했으며, 1996년 MBC 코미디 프로그램 “오늘은 좋은 날”에서 공주병 여고생 컨셉으로 출연하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여세를 몰아 1996년 말에는 태진아 씨의 도움으로 “공주는 외로워”라는 곡으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이 노래는 그녀의 제2의 전성기를 만들어 주었고, 우울증도 극복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1998년 IMF 때 오승근 씨가 사업에 실패하며 당시 돈으로 70억 원의 빚을 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선택했겠지만, 김자옥 씨는 오승근 씨와 이혼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일하며 남편에게 다시 노래할 것을 권했습니다. 결국 오승근 씨는 트로트 가수로 전향해 2001년 “있을 때 잘해”로 재기했고, 이후 “내 나이가 어때서”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김자옥 씨는 이러한 힘든 과정 속에서 암에 걸리게 됩니다. 2008년 대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으며 회복했지만, 암이 전이되면서 결국 2014년 11월 16일,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녀의 마지막 순간, 오승근 씨는 그녀에게 “여보, 걱정하지 마. 영환이 내가 다 장가보내고 모든 것을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고, 김자옥 씨는 힘겹게 눈을 깜빡이며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녀의 밝은 모습으로 많은 이들이 암이 완치된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오승근 씨는 김자옥 씨를 떠나보낸 후 분당에서 청주의 자연 경관이 좋은 곳으로 이사하여 지내고 있으며, 그녀를 기리기 위해 추모관을 선물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 김자옥 님의 7주기를 맞이하며,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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