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직전 한국을 떠올렸다…” 눈물을 터뜨린 이연걸의 고백, 오열한 중국인들, 이경규의 숨겨진 비밀

우리는 이연걸을 가장 사랑했던 나라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이연걸의 영화를 중국인보다 더 오랫동안 사랑하며 그의 화려하고 빠른 액션에 감탄하고 또 감탄했던 추억들이 있는데요.

하지만 자신의 조국인 중국을 가장 사랑했던 이연걸은 흔하게 한국을 방문했던 다른 중화권 배우들과는 다르게 가까운 거리임에도 흔한 방한조차 몇 번 하지 않을 정도의 무관심에 가까운 서운할만한 차가운 행보를 이어나갔습니다. 이랬던 그가 죽음을 앞두고 갑자기 한국에 대한 애틋함을 고백해 화제가 되었습니다.

싸움 실력을 떠나 영화배우로서 그가 국내 팬들에게 큰 의미가 있던 이유는 이미 한국에서 홍콩 영화가 한물 갔다는 평가를 받으며 쇠락의 길을 걸었던 당시 오직 이연걸의 힘으로만 국내에서 꺼져가는 중국 무술 영화의 관심과 인기를 다시 되살렸기 때문에 아시아 중에서는 그의 조국인 중국 다음으로, 한국 팬들이 많았었습니다.

최근 이연걸의 건강 악화로 인한 뜸해진 영화 출연과 더불어 갑작스럽게 푹 늙어버린 외모를 보고 큰 충격을 받거나 자기 일처럼 걱정을 하는 국내 팬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우려와는 반대로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는데요. 그리고 그의 행복은 어느 날 한국에서 깨달은 경험과 가르침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연걸 그는 1963년생으로서 중국 선양시에서 태어났으며 배우 견자단과 동년배이자 같은 무술학교 친구였습니다. 유복했던 견자단과는 달리 그는 가난한 노동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심지어 기억도 안 나는 두 살 때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다고합니다. 하지만 악착 같은 어머니 덕분에 3남 2녀 형제 모두 학교에 들어갔는데 초등학교 때 그의 운동 신경을 알아본 유명무술가 오빈에 의해서 북경 체육운동학교로 일찌감치 스카우트되어 전학을 가게 되었다고합니다.

친구 견자단이 늦은 나이에 빛을 본 인생이라면 이연걸은 시작부터 가장 화려한 꽃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전국 무술대회 5년 연속 우승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과 함께 무술에 관심이 많던 당시 10억 인구의 중국인들 중에서 이연걸은 단언코 이미 어릴 때부터 최고의 스타 자리를 예약한 것과 다름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중국 총리마저 그에게 반해 그를 몇 번이고 찾아가 격려해 줄 정도였고 그는 스타가 되기 전에 미국의 대표 신문 뉴욕타지 일 면을 열두 살 꼬마 이연걸이 장식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이연걸은 열두 살 때 무술 대표단 소속으로 미국 공연길에 오르며 당시 미국의 닉슨 대통령 스카웃 제의에 그는 “죄송합니다. 저는 단 한 명만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저는 10억 명이 중국인을 보호하기 위해 무술을 연마 중입니다.” 라며 유명한 대답을 해서 미국과 중국을 완전히 뒤흔들어 놨습니다.



<동방불패> <의천도룡기> <보디가드> 등의 히트로 한국에서 확실히 이소룡 성룡 다음에 차세대 무술 스타로 자리 잡은 그는 마침내 <정무문>의 홍보차 처음으로 한국에 방한하게 됩니다. 당시 국내 최고의 인기 예능인 <일요일 밤>에 출연했을 때 이경규 는 변발의 황비홍으로 분장하고 가짜 중국어를 구사하며 웃기게 등장했습니다.

코믹하게 중국 무술을 따라 하는 이경규를 유심히 지켜본 이연걸은 미소을 멈추고 “저분이 개그 때문에 웃기게 연기하고 있지만 난 단번에 알 수 있다. 이 사람은 무술을 배운 사람이다. 그의 몸에 익은 보법에서 이미 티가 난다” 라며 통역가에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이경규는 당시만 해도 본인 입으로는 무술 실력을 말한 적 없기에 무술 고수 이연걸 발언을 통해 숨겨왔던 무술 실력이 드러나 화제가 됐었는데요. 훗날 더 드러난 내용에 따르면 이경기 부산의 우슈 관원 1호이자 국내 유명 우슈 사범들이 이경규에게 따로 인사를 할 정도라고 합니다.

이후에도 <리쎌웨폰4> <로미오머스트다이> <키스오브드래곤> 등 헐리우드에서도 성공적으로 안착한 그는 마침내 선배 스타 성룡과 함께 영화 <포비든 킹덤>에 출연하며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뛰어난 무술 실력 대비 너무나 겸손하고 철학적이었던 그는 자신의 무술을 통해 늘 타인을 위한 삶을 고민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여기 이유에는 그가 한국에서 겪었던 사건과 경험이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연걸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눈물을 터뜨리며 고백했습니다.

“영화 소림사 시리즈로 어린 나이부터 스타가 된 나는 성공에 심취해 자만감에 하늘을 찔렀던 시간들을 보냈었다 뭐든지 내가 하면 다 성공할 거란 자만감에 별다른 준비와 경험도 없이 1980년대 말 ‘중화영웅’이란 영화의 감독에 도전하였다. 이후 계속 실패를 했으며 내 결혼 생활마저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런 개인적인 실패 외에도 중국 정부의 간섭과 규제에 염증이 나며 1989년 난 중국을 무단으로 이탈하며 조용히 한국 방문했었다. 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어느 하루 난 조용한 사찰을 찾은 적이 있다. 이때 나는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으며 남의 일에는 절대 관여하지 않는 우리 중국인과는 다르게 따뜻한 정인 넘치는 이 조그만 옆나라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받았었다 그때까지 더 큰 성공에만 계속 집착하고 몰두하던 나는 한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진정한 행복과 인생이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난 이때를 내 제 이의 인생의 출발점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곤 한다.” 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불교에 빠졌고 한때 스님이 되겠다는 출가 선언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토록 인생에서 성공 이상의 더 큰 의미를 항상 찾으려 했던 이연걸은 2004년 가족들과 몰디브에서 쓰나미 사태로 죽을 뻔했던 큰 고초를 겪으며 훗날로 계속 미뤄었던 봉사의 삶을 살기로 마침내 결심합니다. 영화배우를 잠시 접고 자선 사업에 본격적으로 몰두하며 그의 영향력을 통해 이런 사람들과 소외 계층을 돕는 데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현재 영화배우가 아니라 자선 사업가다”라고 말할 정도로 갑작스럽게 바뀐 그의 행보로 인해 중국인들은 충격을 받게 되었고 이연걸의 한국 시절의 경험이 사회적으로 큰 화제 몰이를 했었습니다. 이연걸 제 2의 인생의 계기가 된 한국 스토리는 많은 중국인들을 울려버렸으며 여태껏 한국은 자신들이 불교를 전파해 준 나라라고 무시했던 중화사상 가득한 일부 중국인들조차 한국을 다시 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따거라는 호칭에 어울리는 정말 영웅 같은 인생을 산 이연걸 오랫동안 그의 선한 영향력이 세상을 비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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