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전북 완주군 산골 마을에서 1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난 김병만은 어린 시절 온동네 유명한 말썽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즐거워하는 걸 좋아해 춤을 추면 엄마가 박수를 쳐주고 나무 위에 올라가면 친구들이 좋다며 박수치고 웃어주자 그것만큼 만족스러운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김병만에게 가난이란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는데 원래는 꽤 부유했던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었지만 아버지가 그 돈을 다 날리고 말았죠.
이후부터는 완전히 집안이 기울어 온 집안이 빚더미에 올라 비참할 정도로 가난이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후부터는 가난이라는 가혹한 현실을 맞닥뜨리며 누나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봉제공장에 다녀야 했고, 그 역시도 도끼질에 망치질에,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농촌에서 안 태어나겠다고 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온 식구가 빚에 짓눌려 고난의 행군이 계속되게 되는데, 그래서 그도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남들 다 가는 대학은 고사하고 오로지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서 노가다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던 중 하루는 일을 끝내고 밥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는데,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tv에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본인이 학력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지금과 같은 막일을 평생 한다고 한들 과연 집안의 빚은 다 갚을 수 있을까. 그리고 저 친구가 했다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불끈 치솟아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일을 하기로 마음 먹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님에게도 희극인이 되겠다고 말을 한 뒤 돈 30만원과 연기 학원 전화번호가 적힌 신문 광고 쪼가리만 들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던 그는 정말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데, 연기를 배워보겠다고 도전한 서울예대는 6년을 내리 떨어지고, 개그맨이 되겠다고 도전한 개그맨 시험은 무려 8번이나 떨어지며 상경 이후 고난의 시기가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워낙에 돈이 없다보니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당시 먹을 것이 없어서 라면 하나를 사골이나 죽처럼 불려서 먹고 노숙은 밥 먹듯이 하며 그야말로 고생 그 자체였습니다.
이처럼 견디기 힘들었던 암담한 생활이 계속되자 하루는 술김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왜 이리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게 했냐며 따지자 그의 주정을 다 들은 어머니는 뜻밖에도 ‘미안하다.’고 하시자 그때 술이 번쩍 깨면서 차라리 욕이라도 했다면 가슴이 아프지 않았을 텐데 당시 어머니께 너무 미안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꿈을 가지고 서울로 상경했지만 7년 간 아무런 성과가 없자, 하루는 아버지가 전화가 와 집에 돌아올 것을 권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그는 냉정하게 얘기한 후 이후 몇 년 간은 아버지와 대화를 하지 않는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이때는 되는 게 하나도 없어서 좌절하고 그만하려고 해도 뒤돌아보면 너무 먼 길을 온거라 포기하기에도 이미 늦어버렸고, 결국 해서는 안 될 나쁜 생각까지 하며 벼랑 끝에 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겁이 나면서 이런 정신으로 뭘 못하겠냐는 생각이 들어 두고보자며 이를 갈며 다시 일어섰고, 그런 와중 이수근을 만나 두 사람이 콤비를 이루어 2001년 KBS 공채 시험을 봤는데, 또 떨어지면서 총 8번이나 낙방하게 됩니다.
그러다 1년을 더 준비해서 마침내 9번 도전 끝에 내가 KBS 공채 17기 개그맨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코미디언이 된 그는 이후 개그콘서트에서 <달인>이라는 코너를 통해 일약 스타가 되었고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의 빚도 조금씩 정리해 드리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효도를 하려고 마음먹게 됩니다.
그래서 목돈이 생기자마자 아버지께 집을 지어드리려고 할 즈음 아버지의 대장암 판정과 더불어 당시 가족들 누구도 알지 못했던 치매까지 발견되게 됩니다.
당시 가족들이 아버지의 치매를 전혀 몰랐던 이유가 어려운 형편 때문에 어머니는 일을 나가시고 누나는 시집가고 동생들도 다 돈 벌러 나가면서 누구도 아버지가 아버지의 상태를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아버지가 외로우셨는지 매일 술만 드셨고 결국 이후 서서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10년 전부터 치매가 진행되었다가 암이 걸려 수술을 앞두고 그제서야 아버지의 상태를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아버지한테 지금도 제일 죄송한 게 과거 몇 년간 말을 하지 않다가 내가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면서 그나마 푼돈 정도 집에 보낼 무렵 아버지와 했던 이야기가 있다.
“그때 동네에 앉아가지고 아버지 그때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대신 저기 건너편에다가 땅을 사서 나중에 멋진 집을 지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자 아버지가 별말씀을 안 하시고 ‘그래 좋지.’ 이 한마디만 하시더라.
하지만 이후 아버지가 치매로 인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한 번은 내 친구와 함께 아버지가 계시는 병원에 갔는데 친구의 말에는 대답을 하시고 내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으시더라 아마 그때 아버지와 말을 하지 않았던 그 몇 년간의 불효가 혹시 서운한 감정으로 남아서 이러시는 게 아닌가 싶어 그게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
그리고 이 무렵 동네 사람들이 내가 개그맨이 되고 성공하니까 변했다면서 하는 말이 아들이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보러 내려와 보지도 않는다. 김병만은 아들도 아니다며 나를 욕하는 소리가 들리더라 그런데 솔직히 진짜 내려갈 수가 없었다 왜 돈을 벌어야 하니까.
아버지의 병원비도 내야 되고 내가 열심히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시집간 누나는 월세방에 살 정도로 가난했고 동생도 결혼을 했지만, 결혼 생활이 불행해 당시 조카마저도 내가 데리고 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효도라는 걸 뭔가 내가 성공한 뒤에 모아서 근사하게 해드리려고 했던게 그게 잘못된 거 같다. 효도라는 건 큰 선물이 아니라 보잘것없던 때라도 그때그때 조금씩 효도를 해드렸다면 아버지가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게 가장 후회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이후 아버지는 김병만이 달인이라는 코너로 코미디언으로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2011년, 끝내 하늘로 떠나게 됩니다.
한편 이 무렵 마흔이 코 앞인데도 결혼을 하지 않고 노총각으로 살던그가 돌연 7살 연상의 키도 본인보다 8cm나 더 큰 여자친구와 결혼 발표를 하며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그런데 당시 어머니가 그의 결혼을 결사 반대하기도 했었는데 그 이유로는 초혼인 아들과 다르게 며느리가 애 딸린 연상에 재혼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끝내는 결혼에 골인하게 됩니다.
아무튼 이후 비록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에게도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또한 아버지께 못해 드렸던 효도를 어머니에게 마음껏 해드리며 마침내 김병만 그에게도 따뜻한 꽃길이 펼쳐지게 됩니다.
특히 어머니께는 한평생 살아오면서 본인의 명의로 된 집을 처음으로 선물해드리자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우셨고 이후 아들이 마련해 준 집에서 조그만한 정원을 가꾸며 무척 행복해하자 이를 지켜보는 김병만 역시 그런 어머니를 볼 때마다 왜 그렇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지 모를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코미디언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들로서 모든 것이 탄탄대로 꽃길이 펼쳐지던 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정말 안타깝게도 2022년 5월 뉴스에서는 그의 어머니의 안타까운 소식이 보도되게 됩니다.
당시 뉴스에 따르면 전북 부안의 한 갯벌에서 조개를 잡던 70대 여성이 밀물에 고립돼 생을 마감하는 사고가 발생했다며 보도가 나갔었는데 하필 그 여성이 김병만의 어머니였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그의 어머니는 조개 등을 채취하다가 물이 들어오는 때를 뒤늦게 인지하고 육지로 빠져나오지 못해 사고를 당하면서 하늘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김병만 그가 고백하길 “사실 나는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 이유는 누이들이 모두 결혼 생활에 순탄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손이 누이는 이혼 후 아이 셋을 키우며 혼자 생활하고 있고 막내인 여동생 역시 이혼해 지방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그나마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바로 아래 동생도 형편이 넉넉지는 않다. 이처럼온 가족이 모두 힘들게 살았는데 그 중 특히 어머니가 제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는 평생을 굉장히 가난하게 사셨는데 소학교 시절에는 남의 집 자갈을 몰래 훔쳐 가져다 주고 공책으로 바꿨었다고 하실 정도였다. 어머니의 처녀 때 사진을 보면 허름한 집 앞에 검정고무신 신고 서 있는 모습이 정말 없이 살았구나 싶더라.
사실 우리 할머니가 무당이신데 여기저기 침 놓아주러 다니다가 어머니를 본거다. 그때 어머니 나이가 스물. 할머니가 데리고 와서 며느리로 삼았다. 그때만 해도 할머니는 동네에서 세 번째로 잘 살았고 그렇게 어머니는 있는 집으로 시집을 오긴 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쭉 고생길이었던거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말을 안 들으면서 남의 얘기에는 귀가 얇았다. 큰아버지들이 하는 말에 혹해서 땅 판 돈 다 말아먹고 결국 다 쓰러져가는 집으로 쫓겨가다시피 해서 살아야 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어머니는 식당, 허드렛일이라도 하겠다며 상경했고, 나도 코미디를 하겠다고 서울로 온거다.
그렇게 수십년을 어머니가 식당 일을 하며 생활을 꾸리셨는데 손톱이 다 닳아 없어질 정도로 일을 많이 하셨다. 그러다 내가 코미디언으로서 큰 돈을 벌게 되자 어머니의 명의로 된 집을 선물해 드렸더니 한평생 처음 있는 일이라 그런지 아무 말 없이 우시더라.
사실 낡은 한옥집인데도 귀하다면서 조심조심 생활 하셨다. 그리고 집에는 조그만 정원이 있는데 거기에 과일이며 채소며 다 심어 놓고 정원을 가꾸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 보내 주시기도 하는데 그런 어머니를 볼 때마다 왜 그렇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지 모르겠다.
내가 나이가 들수록 몸은 굉장히 단련됐는데 마음은 나약해져서 부모님 생각만 하면 감정이 자꾸 울컥한다. 이제는 작은 키조차 감사할 만큼 모든 것에 감사하다.”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