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에 안보이는 이유가 있었네…” 맹구 이창훈 갑자기 사라진 충격적인 이유와 최근 밝힌 눈물의 고백

1991년 <한바탕 웃음으로>의 ‘봉숭아 학당’ 코너에서 ‘이맹구’라는 캐릭터가 세상에 나오자 순식간에 엄청난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 코미디계의 역사에 하나의 방점을 찍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미지 관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막나가는 표정 연기와 눈을 뗄 수 없는 맹구의 철저한 바보짓은 당대 바보 캐릭터 최고봉이었던 심형래의 ‘영구’조차도 압도할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양손으로 가면을 흉내낸 모양을 만들며 배트맨을 외치고 “저요 저요” 하면서 난리를 치고 하는 것이 히트를 치자 당시 초중고에서 그를 하도 따라해서 수업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이창훈 그는 심형래의 영구와 더불어 한국 코미디계의 ‘맹구’라는 전설의 캐릭터를 만들어 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모든 TV 방송 활동을 완전히 중단하고 심지어 연예계마저 은퇴하게 됩니다.


이창훈 그는 맹구라는 캐릭터로 부와 명예를 다 가졌지만 훗날 그가 “코미디는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코미디를 멀리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한국 코미디계의 전설적인 캐릭터인 ‘맹구’로 큰 사랑을 받던 이창훈 그가 코미디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인생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합니다.

이창훈은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코미디언 이전에 본래는 연극계에서 활동하던 연극배우였고 1986년 서울연극연출가그룹 ‘최우수연기상’까지 받았습니다.
그는 평소 말수가 적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며 표정 변화가 없는 과묵한 성격으로 육군 특전사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친동생은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이미영’으로 한때 오빠의 캐릭터로 인해 배우 이미영이 아닌 “맹구 여동생이다” 이런식으로 그녀가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연극계에서 활동하던 과묵한 이창훈이 코미디언으로 데뷔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최양락’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최양락이 대학로에서 <관객 모독>이라는 연극에 출연한 이창훈의 연기를 보게 되는데 그의 연기력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지금이야 오락 프로그램들이 토크 위주의 수단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콩트 위주의 프로그램이 대다수였고 코미디언들도 배우나 마찬가지로 연기력이 중요했습니다.
그로 인해 최양락 그는 당시 <유머 1번지>, <한바탕 웃음으로> 등을 연출하고 있던 수많은 코미디언들을 배출시킨 김웅래 PD에게 이창훈을 추천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김웅래 PD 또한 이창훈의 연기를 보고 큰 감명을 받게 되었고 대학로 극장 앞 커피숍에서 매일같이 이창훈을 만나서 “TV에 출연만 하면 넌 반드시 스타가 될 수 있다. TV 출연만 승낙하면 너의 주변 연극인들도 TV에 출연시켜서 뜨게 해주겠다.” 등의 말을 하며 이창훈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결국 이창훈은 당시 본인의 경제 사정도 여의치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 연극인들도 같이 TV에 출연시켜서 뜨게 해주겠다는 PD의 말에 결국 출연을 승낙하였고 그렇게 브라운관에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창훈은 1990년 3월 KBS2 코미디 하이웨이 코너 ‘첫사랑 주식회사’로 데뷔를 하였습니다.

이후 1990년 7월, 유머 1번지의 ‘맨손의 청춘’ 코너에서 목욕탕 때밀이 ‘이달용’이라는 팔푼이 캐릭터로 출연해 “난 짜장은 정말 싫어. 난 짬뽕!”이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키는데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중화 요리에서 원래는 중국 우동이 더 보편적이었으나
짬뽕의 주가가 짜장면 급으로 올라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난 죽어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리바이벌은 안 해”라는 유행어까지 만들며 일약 스타 코미디언으로 등극하고 그해 바로 KBS 코미디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다음 해 1991년에 한바탕 웃음으로의 ‘봉숭아 학당’에서 앞서 얘기한 대한민국 코미디계의 역사에 남을 캐릭터 ‘이맹구’라는 캐릭터가 탄생하였습니다.
정말 이미지 관리를 전혀 하지 않는 막나가는 표정연기와 이리저리 비틀어대는 몸개그를 하는데 훗날 그가 인터뷰에서 말하길 본인이 어릴 때 별명이 뼈 없는 놈이었고, 맹구의 목소리는 자신이 만든 게 맞으나 비틀어대는 몸은 연습한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맹구의 동작 하나하나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철저한 바보짓은 당대 최고의 바보 캐릭터 심형래의 ‘영구’조차도 압도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답해 볼 사람” 하면 학생들이 서로 손을 들고 답변을 하려고 하는데 맹구가 “저요 저요” 하면서 난리를 치고 결국 답변권을 얻어내는 것이 히트를 쳤습니다.


당시 초중고에서 이걸 하도 따라해서 수업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고 이러한 이창훈의 이맹구 캐릭터는 당시 SBS로 많은 선배들이 이적한 가운데 KBS의 자부심을 지켜낸 공이 굉장히 컸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최고의 한 해를 보내던 이창훈 그는 다음 해 1992년 6월 10일에 정말 뜬금없이 구속당하게 되는데 바로 무허가 술집 “뿌르보”를 차리고 접대부 10명을 데리고 불법 심야 영업을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7월 28일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고 이때 자숙 기간 동안 연극계로 다시 돌아갈까 했으나 이미 대한민국은 맹구 신드롬이었고 특히 어린이 팬의 복귀 요청이 엄청났을 정도로 최정상에 있었기에 당연히 주변에서도 말렸고 결국 신인의 마음가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맹구가 자숙하는는 동안 <봉숭아 학당>에서는 맹구가 등굣길에 논두렁에 빠져서 입원했다는 이유로 빠졌고 이후 <봉숭아 학당>은 잠시 오서방 독주 체제로 가다가 “정신이 돌아온 맹구가 귀환하다 머리를 부딪혀.. 바보가 되다”라는 설정으로 다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복귀 당시 사건으로 인해 비난도 받고 했지만 하지만 도저히 맹구의 인기는 막을 수 없었고 결국 1992년 KBS ‘코미디 대상’까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1993년 11월 8일을 끝으로 <봉숭아 학당>이 막을 내리고 맹구 이창훈과 오서방 오재미는 희극인실에서 공로패를 받았습니다.

이창훈 그의 전성기 시절 코미디 시상식 등에서 맹구 분장을 안한 이창훈의 본모습을 보면 의외로 고전적인 미남상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맹구 캐릭터가 너무 강렬해서 이후에 그가 잡게 되는 역 특히 진지한 역의 배역을 맡을 때마다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혹평을 듣게 되고 방송에서 결국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가다가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맹구라는 캐릭터의 후광을 극복하지 못한 채로 방송 활동을 결국 접고 말게 되었습니다.

사실 앞에서도 얘기했듯 이창훈은 본래 방송보다는 무대 공연 즉, 연극에 애착이 큰 사람이어서 정극 연기에 대한 갈망이 굉장히 컸으며 맹구를 그만둔 이유도 결국은 정극 연기와 당시 노모의 병간호를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방송 활동을 중단한 뒤에는 그가 그토록 원하던 많은 연극 무대에 참여해왔고 노모가 병에 걸려 드러눕자 그때부터는 모든 사회 활동을 포기하고 어머니를 위해 여기저기 산을 다니며 약초를 캐서 어머니에게 바쳤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전설적인 맹구가 우리들 곁에 사라진 후 훗날 그가 연극 무대로 돌아와 방송을 그만둔 이유에 대해 직접 고백하길 “15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원래 정극 배우였고 코미디 프로그램을 또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당시 개그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쪽에서 짜여진 대본대로 연기에 충실했을 뿐인데 개그맨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박혔습니다. 타계하신 어머니의 병환은 당시 핑계였고 그때부터 코미디를 멀리했습니다.”


그리고 항간에 ‘맹구가 은퇴하고 주로 놀러 다니고 여행 다닌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것은 모친의 병에 좋다는 약초를 구하기 위해 전국에 있는 산을 모조리 뒤졌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청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바보 ‘맹구’ 캐릭터 자체에 대해서는 그 역시 애정이 각별하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길 “나 역시 바보 류의 캐릭터를 좋아한다. 문명의 발달로 인간성 상실이 커져가는 이 시대에 순수하고 사회 물이 안 든 바보 캐릭터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줄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맹구라는 캐릭터로 큰 사랑을 받아 행복했지만 정상에 있으면 쫓기기 마련이고 그 초조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러나 나름대로 끝까지 열심히 살아왔고 긴 시간 동안 돌고 돌아 적당한 시기에 연극이라는 고향에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의 동생이 ‘이미영’이 친오빠 맹구의 근황을 공개하게 되는데 오빠가 폐암 투병을 했지만 살려고 그랬는지 검사 받으러 갔다가 초기에 폐암을 발견해서 수술 후 5년이 지나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어 연예계에서 자취를 감춘 이유에 대해 “오빠도 힘들었다. 정극을 하고 싶었던 사람인데 맹구로 너무 떠버리니까 다른 역할은 안되고 어느 정도 하다가 미련없이 연예계를 떠났고 현재는 비연예인으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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