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환이 정말 무서웠다…” 김성주가 방송초기 안정환을 무서워 했었던 충격적인 이유

전 축구선수 안정환이 무당에 기댈 수밖에 없었고 조폭마저 되려했다고 밝혀 네티즌들에게 놀라움을 안긴 적이 있는데요.

안정환 1976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그는 2002년 월드컵에서의 활약과 미쳐버린 외모로 인해 국내에서 오랜 시간 동안 탑스타의 자리를 유지했습니다. 아직도 많이 회자되는 그의 귀공자 같은 외모와 다르게 안정환은 운동선수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의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친아버지 얼굴도 모르며 인생을 시작한 그는 살 집이 없어서 초등학생 때부터 여기저기 얹혀사는 신세로 살게 됩니다.

한 학기에 10번 넘게 이사할 정도로 가난하게 자랐으며 배불리 먹어본 적도 없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패셔니스타라는 평가를 받는 안정환이지만 당시에는 옷이 한 벌밖에 없어 일주일에 닷새씩 똑같은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런 안정환을 두고 ‘친구들은 넌 옷이 그거밖에 없냐고 놀렸다’며 그럴 때마다 그는 ‘나는 똑같은 옷이 다섯 벌이야’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는데요.

항상 배고팠던 안정환이 꿈은 축구 선수가 아니라 슈퍼마켓 주인이었다고 합니다.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고 싶었기 때문인데요. 이모 집에 얹혀 살던 안정환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부에 들어오면 빵과 우유를 먹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고아원에서 자란 친구들과 함께 축구부를 들어갔습니다. 2002년의 월드컵 골든골의 전설은 이렇게 빵과 우유에서 시작되었다고합니다.

배고픈 그는 항상 눈칫밥을 배부르게 먹어야만 했다고 밝혔는데요. 이모 집에 얹혀 살면서 축구를 시작한 무렵에는 이모와 이모부의 부부싸움이 잦았기에 고된 훈련을 마치고 밤늦게 이모 집으로 돌아와서 문을 살짝 열고 집안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 그가 가장 문저 했던 일이었다고합니다.

그러다 부부싸움이라도 하는 날에는 집에도 들어가지 못해서 밤 11시건 12시건 골목에 쭈그려 앉아 싸움이 잦아지기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당시 이모댁은 중앙대 학교 근처 언덕이었는데. 집에 들어가지 못할 때면 중앙대 누나들이 사주는 간식으로 끼니를 대신했다고합니다.

갈 곳도 먹을 곳도 없었던 열한 살에 안정환이 수원으로 이사했을 땐 학교까지 버스를 갈아타고 무려 두 시간은 가야 해서 오전 운동을 하기위해선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야만 했던 환경은 어린 안정환에게 너무나 힘겨운 하루의 시작이었고.

얹혀 사는 주제에 새벽부터 학교에 간다고 부산을 떠는 것도 눈치가보여서 그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는데 바로 학교 창고에서 잠을 자는 것이었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처음부터 가난한 인생을 아니었다고 하는데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육아를 외갓집에 맡기며 6살 전까지는 큰 어려움 없이 유복하게 자랐었습니다. 그러나 6살 때 자신을 키운 외갓집 대 사업 실패로 나락으로 떨어지며 경제를 부양하던 외할아버지가 충격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외할아버지의 유산으로 커피숍을 하다가 망한 뒤 떠났기에 외할머니와 단둘이 빈곤한 판자촌에 남겨지면서 굶주림과 싸웠던 꼬마 안정환은 자신의 달리기가 빨랐던 이유에 ‘배고프지 않기 위해 항상 항상 먹을 거 훔치고 달렸기 때문입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에게 빵과 우유를 지급해 줬던 초등학교 축구부는 후원이 끊기며 폐지를 하게 되었지만 다행히 안정환는 유일하게 다른 학교에서 스타가 된 학생이었습니다. 이후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도 축구부에서 열심히 훈련했지만, 그는 또래의 10대들과 달리 항상 많은 일을 병행했습니다. 5호선 목동역은 자신이 지었다는 농담을 할 만큼 막노동과 더불어 안정환의 와이프가 놀랄 정도로 과일을 잘 깎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신길동 나이트클럽에서의 웨이터 생활 등 일찌감치 10대 때부터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는데요.

축구와 일 이 두 개를 병행하는 것도 사실 힘든데 그를 더 좌절하게 만든 것은 바로 선배들의 구타였습니다. 한 번은 축구부 인원수대로 지급받는 빵과 우유가 하나씩 비자 선배 한 명이 안정환을 세 시간 동안이나 구타했다고 하는데요 여기서 이걸 먹을 사람은 식탐이 많은 너밖에 없다는 논리로 말입니다.

그러나 늦게 들어온 다른 선배가 ‘그거 내가 먹고 나갔는데’ 이 한마디에 구타가 멈추자 그길로 합숙소를 도망쳤다고 합니다. 너무나 분하고 억울했기 때문했다고 하는데요.

이런 분노는 그에게 잘못된 선택을 할 뻔하게 만듭니다. 그는 자신의 중고등학교 시절에 대해서 말하길 ‘살기 위해 했던 축구라서 즐거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시 내 운명에 대한 비애감과 분노만 늘어나서 화가 가득했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 정말 싸움도 많이 했었는데 굶주리고 사나운 인생이라 겁날 것도 없던 시기였다’며 더불어 ‘이런 나의 싸움 실력과 가능성을 보고 지역의 유명 건달 조직에서도 스카웃 제의를 여러 번 받았었다 그렇게 축구를 때려치고 일이 조폭이든 다른 길을 택하러 했을 때 불현듯 나도 몰랐던 내 마음속의 축구에 대한 사랑을 처음 느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도망도 많이 다녔지만 항상 맞을 거 알면서도 다시 복귀했다’며 말한 적 있습니다.

그는 이런 고된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진흙 속의 진주처럼 빛이 났기에 아주대와 K리그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이태리 리그에 최초로 진출했었고 2002년 전설을 만들어냈습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의 고생을 보상받을 줄 알았던 안정환이지만 에이전트에 배신을 당해 개인 빚이 35억 원에 달했었고 그의 모친은 안정환의 이름을 팔면서 도박 빛을 끌어 썼기에 이런 것들을 해결해야만 했던 안정한의 재산은 당시 오히려 마이너스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독기의 사나이답게 그는 불운과 항상 싸워나가며 결국 축구와 방송계에서 계속된 맹활약을 펼치며 성공했습니다. 그의 전설적인 성공담을 보자면 사실 지금보다 더 큰 부와 더 화려한 축구계의 족적을 남겨야만 했지만 30대가 지나면서까지 그를 괴롭혔던 신의 미움은 정말 지독했었는데요.

이 정도의 고난이라면 뭇사람들처럼 좌절도 하고, 무당을 찾아가서 무속신 이 기댈 수도 있겠지만, 그가 오직 무당에 의지한 것은 불안한 마음이 아니라 단지 음식이었다고합니다. 어린 안정환은 한강 둔치에서 무당들이 굿판을 벌일 때면 소원 하나 빌지 않고 무당이 남기고 가는 굿판에 떡과 과일에 의지하며 오직 자신의 몸뚱아리만 믿고 나아갔을 정도로 독한 사람이었습니다.



국가대표 동료인 차두리를 보며 그의 아버지가 차범근이었다는게 마음속으로는 너무나 부러웠다던 불운의 안정한은 어느 한 언론에서 그가 처음 자신의 속마음을 이렇게 밝힙니다. ‘어릴 적에는 어려운 형편을 많이 탓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평범한 환경이었다면 이것보다 더 잘나가고 좋은 결과가 있었을 텐데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를 괴롭히고 못 살게 한 환경이 절대 포기하지 않는 독기를 선물하기에 이만큼이나마 축구선수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라며 말했습니다.

40대가 훌쩍 넘은 그는 아직까지도 음식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고 하는데요. 김성주가 안정환이 밥을 굶으면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져서 조심한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가난의 트라우마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안정환이지만 현재는 누구보가 행복한 과정을 이루었고 앞으로의 남은 인생도 행복하게 사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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