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정말 잘 알려진 연문 주인공인 견자단이 연문포를 마지막으로, 은퇴 소감을 말하던 중국인들이 난리 날 만한 충격 고백을 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자국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 그의 강직한 성품과 솔직한 용기는 그동안 견자단이 연기했던 수많은 멋진 영화 속 주인공을 연상케 합니다.
그는 1990년대부터 수많은 영화에 출연한 홍콩 무술 배우이지만 우리 한국 팬들의 눈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건 할리우드 블록버스트 시리즈 블레이드2 의 조연을 시작으로 2008년 대히트를 친 연문에서의 활약이 결정적일 겁니다. 후로도 꾸준한 히트작을 내놓은 그는 한국과 중국에서 인기 배우로 더욱 거듭났는데요.
이런 그가 연문 포를 마지막으로, 그의 나이 60세에 은퇴를 선언하면서 그동안 중국 무술 영화를 연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태권도 사례를 들며 너무나 솔직한 고백을 하여 화제가 되면서 이런 고백은 중화사상 자부심이 넘치 중국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견자단 그는 1963년생으로서 중국 광저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평범한 신문 기자였지만 어머니 맥보살은 무당권과 태극권의 고수였는데요. 참고로 그의 어머니가 얼마나 무공이 대단했냐면 이소련과 장클로도 받는다는 영화에서 악역의 아이콘으로 유명한 양사희 선배이자 90년대 헐리우드에서 중국 무술을 크게 전파한 여장부이기도 합니다. 1994년 1996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여자 무술가로도 뽑히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를 제외하고 그의 가족은 모두 무술에 정통했지만, 견자단이 처음부터 무술가로서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피아노 및 바이올린 등 음악의 조의가 깊은 아버지와 무술외에도 소프라노 실력으로 입소문이 자자했던 어머니를 보며 원래는 무술 대신 피아니스트를 꿈꿀 정도로 음악적인 환경에서 자란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갓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무술 고수인 어머니의 혹독한 가르침을 받고 열한 살 때 낯선 미국의 보스턴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가 살던 곳은 보스턴 내에서도 매우 불안정한 치안으로 유명했는데요.
낯선 환경에서의 외로움을 덜고 또한 자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그는 지금까지 어머니 때문에 마지못해 했던 무술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매일 차이나타운의 극장을 돌아다니며 이소룡에 대한 영화를 질릴 때까지 보고 집에 와서는 이소룡의 움직임을 아주 세밀하게 관찰하고 반복을 거듭했다고합니다.
집념이 생겨버린 그는 학교도 자주 빼먹을 정도로 무술 영화와 수련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다 열다섯 살 무렵 몸으로 하는 또 다른 예술인 비보잉에 빠지며 보스턴의 유흥가에서 친구들과 항상 춤판을 벌이곤 했는데 이 보이들 간의 패싸움에 하루가 멀다 끼어드는 불량 청소년이 되어 버렸습는데요.
당시 견자단의 친한 친구는 전설이 된 10대 시절 그의 싸움 실력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어려운 춤을 추는 비보잉을 하려면 또래보다 월등한 힘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비보잉 한다는 친구들은 대개 힘 좀 하나 쓴다는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더욱이 거친 보스턴에서도 사납고 힘세다고 소문난 친구들이기에 공연 이후에는 싸움을 안 했던 게 손에 꼽을 지경이었다. 공연에서는 별다른 마찰은 늘 없었지만 그의 친구가 일대일 싸움이 아닌 다수에게 부당하게 맞을 때면 우리 중 가장 용감하게 패싸함에 끼어들어 그의 분노 표출했다’ 며
그 사건 이후로 보스턴 비보이 사이에선 아시아 사람은 건드리는 게 아니라고 소문이 났다라고 말했는데요.
사실 어렸을 때부터 아침 6시마다 어머니 밑에서 혹독하게 무술을 배운 그였기에 10대의 동년배 또래들을 제압하는 건 너무나 손쉬운 일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불량 청소년의 길에 빠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술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생각에 단지 비보잉 춤에 빠졌을 뿐 약자를 괴롭히거나 나쁜 일에 그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님들의 입장에선 비보잉 하는 아들의 모습이 걱정되었기에 그의 어머니는 독한 마음을 먹고 젼자단을 홀로 국경에 있는 무술학교에 보내버리고 맙니다. 이때 그와 같이 무술 수업을 받은 또 하나의 전설이 바로 이연걸인데요.
견자단이 회고하길 ‘이미 이연걸은 당시에도 전국적인 스타였기에 동갑내기 친구라는 느낌보다는 우러러보는 우상’ 의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무술학교에서 이연걸은 항상 일 등 견자단은 항상 이 등이었죠. 후로도 영화판에서 견자단은 이연걸의 그늘에 항상 같이 2인자의 역할을 수십년을 해야만 했던 운명의 암시는 그들의 10대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그렇게 2인자로서 수련을 마친 19살 무렵 그는 홍콩에서 본격적인 영화배우에 도전합니다. 운이 좋게도 일찌감치 영화 소태극에서 주연을 맡았으나 흥행에 실패했고 무술학교 동기 이연월의 작품에 주로 조연으로 출연하며 늘 그늘을 가렸으나 아침내 황비홍2에서 이연걸 못지않은 주목을 받게 되며 영화계에서 입소문이 났습니다.
특히 그는 본인만의 독특한 액션을 만들어 나가는 배우라고 명상이 자자졌죠 1990년대까지 성룡과 이연걸의 가려졌던 견자단은 이 둘의 활동이 주춤해진 2000년대부터 본격적인 날개를 피기 시작하는데요.
영웅에서 이연걸을 상대로 한 그의 멋진 창술이 큰 화제가 되었으며 무술 감독을 직접 맡은 살파람과 도화선을 통해 온갖 무술 감독상을 휩쓸어 버렸죠 이어서 블레이드2로 헐리우드에서도 호평을 받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인생 영화인 엽문에서 그의 나이 46에 최전성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수많은 국가에서 히트를 친 이 작품은 시리즈로 이어졌고 시대의 복서 타이슨이 출연한 연문 쓰리 에서는 전설적인 비하인드스토리가 화제였습니다.
타이슨의 촬영 중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뻗은 레프트 혹을 쉬운셋의 견자단이 동물 쪽으로 피해버린 장면이었죠. 이를 두고 사람들은 ‘클럽에서 자신의 부인에게 치근덕거린 8명 일행을 괜히 한 번에 때려 눕힌 실력’이 아니라며 그를 실전 우술인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엽문4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견자단은 자신의 10대 시절을 추억하며 태권도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방황했던 미국의 10대 시절 나를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해준건 태권도였다. 태권도가 대단한 점은 무술 중에서 가장 다양한 발차기 기술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무도가로서의 예절과 인생에서 명심해야 할 법도를 가르친다는 것에 있다.
어머니에게 배운 중국 무술의 경우 정신적 수양보다는 주로 신체 수양에 집중했다면, 나를 가르쳤던 한국의 태권도 사범은 기술을 연마하기 전에 늘리 에의와 인내에 관해 강조하며 우술가 이전에 사람이 먼저 돼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난 태권도 수련 과정에서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나쁜 불량 청소년이 되지도 않았으며 기나긴 2인자 역할도 항상 인내며 버텼었다 그래서 내 아들에게 가르친 첫 번째 무술은 바로 태권도였다” 이런 견자단의 고백은 중국에서 큰 화제가 되며 중국 네티즌들의 설랑 선례가 이어졌는데요.
중화 사상의 눈이 먼 일부 중국인들의 큰 비난을 받았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이런 발언은 화제가 되어 중국 내 태권도 인기에 큰 역할을 해냈었죠. 젊을 적에는 화려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노화가 진행되어 영화 수명이 짧았던 이연걸에 비해 늘 꾸준히 성장하며 50대 무렵이 되어서야 마침내 1인자를 차지한 견자단 그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