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이 씌어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려 했었다..” 이상아 3번의 이혼, 전재산 모두 잃고 생활고 겪다가 귀신까지 들린 안타까운 근황, 유재석의 생생한 증언


80년대 90년대에 열악했던 우리의 교육 환경을 떠올려 보자면 여름에는 몇 개 안 되는 선풍기로 간신히 더위를 달랬고 겨울에는 교실 한 정앙에 놓인 화루난로로 언 손을 녹이군 쉬는 시간이 되면 난로에 모셔둔 군고구마를 꺼내 먹던 게 떠오르는데요.

이렇게 추위와 더위를 이겨가며 공부를 했던 것 외에도 울퉁불퉁 홈이 파였던 나무 책상은 이쁘게 필기하는데 꽤나 곤혹이었습니다.

때문에 책받침이 당시로선 필수 학용품이었는데. 지금의 핸드폰 케이스처럼 책받침은 학생들의 취향을 대변했었는데 책받침에 가장 많이 등장했던 이사하는 그야말로 만화 속 캐릭터 같은 시대의 외모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이런 아름다운 얼굴과는 다르게 세 번의 이혼녀 꼬리표를 통해 뭔가 문제가 있는 괴인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이혼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한 이상아는 결국 귀신에 들린 채 비극적 시도를 해 많은 네티즌들의 안타까움을 샀는데요. 심지어 유재석이 생생한 증언을 토로하면서 더욱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상아 사주팔자는 태생부터가 정말 지독했는데요. 둘째인 그녀는 어릴 적부터 언니를 대신해 소녀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녀의 가난한 집안을 구해낼 수 있던 유일한 희망을 바로 절세미녀라고 불러도 손색없던 이상아의 얼굴이기 때문이었기 때문인데요.

재벌가에서 자랐다고 말해도 전혀 위화감 없던 순백의 외모 덕에 그녀는 일찍부터 주변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중학교 1학년 무렵 연기학원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찌나 아름다웠던 외모인지 이상아는 연기학원에 가자마자 김재순 피디의 눈에 들어 바로 다음 날 캐스팅이 되었는데 신는 마측 그녀의 험난한 인생을 미리 예고하듯 이사하는 데뷔 때부터 열 네 살의 소녀가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입게 됩니다.

첫 작품이었던 KBSTV 문학관에 ‘산사에서다’에 출연했을 당시 그녀가 맡은 역할은 동자생 역할이었는데. 이상아를 인생역전에 유일한 희망으로 여겼던 어머니는 초반부터 강한 인상을 남겨야 한다며 삭발을 그녀에게 강요했는데요.

열 네 살의 감수성 여렸던 소녀에겐 그야말로 청천병력 같은 강요였지만 결국 모친의 성화의 머리를 깎고 경주에서 촬영에 들어갔는데 당시 수학여행을 왔던 또래의 학생들이 그녀를 보면서 ‘저게 여자야 남자야 생긴 건 여자인데 헷갈리네’ 하고 깔깔대던 모습을 보며 밤새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하지만이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같은 해에 연속으로 일어났는데 갓 데뷔한 열 네 살 소녀였던 그녀는 임권택 감독의 캐스팅을 받게 됩니다. 이상아가 회고하길 ‘보통은 감독들이 연기자를 캐스팅할 땐 대본을 먼저 주곤 한다.

하지만 나는 캐스팅이 된 이후에 대본을 받게 됐는데 당시 내 나이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로 가득찬 대본이었다.

그러나 어렵던 내가 봐도 상대 배우 손이 내 엉덩이를 쓰다듬는 그런 야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어 굉장한 충격을 받았었다 삭발까지 강요하던 어머니마저 너무 놀란 나머지 감독님에게 전화해서 출연을 못 하겠다고 말했는데 감독님이 우리 어머니를 설득하며 말하길 나도 일찍 결혼했으면 상하 같은 딸이 있었을 텐데 그런 짓을 감히 제가 시키겠어요.

절 믿고 따라오세요라고 하셨다’ 라며 말했습니다.

하지만 약속과 달리 뽀뽀 정도로만 예상했던 수위는 이내 전라 노출 요구로 발전했고 그녀는 울며불며 거부를 했지만 감독은 ‘돈 많으면 지금까지 찍었던 필름값 네가 다 물고 가’ 라며 오히려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런 노출신에도 임감독은 당시 미성년자인 그녀에게 딥키스신 요구는 물론이거니와 성인끼리 나눌 법한 스킨십을 요구했는데 이것은 한국 영화의 거장으로 꼽히는 인권택 감독의 어두운 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처음부터 고생한 덕분인지 그녀는 이후 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하이틴 스타로서 큰 인기를 얻었지만 돌연 충격의 발표를 하게 되는데요 바로 신인 개그맨 김한석과의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였습니다.

당시 그녀는 절정의 인기를 누렸기에 신인 개그맨과의 결혼도 의외였고 무엇보다 인기 탤런트 이창훈과의 열애설이 터진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4개월이란 짧은 연애만 하고 결혼을 서둘렀던 이유에 대해서는 ‘사랑에 의해 결혼했다기보단 마치 운명에 이끌려 결혼했었다’ 라고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김한석의 부모로부터 우연히 식사에 초대받았는데 공유롭게도 초대 당일 날 김한석 부모님께서 다치게 되어 초대받은 이로써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계기로 김한석과 가까워져 급속도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더불어 ‘무엇보다 결혼은 내겐 일정의 도피차’였다며 가난했던 부모님은 물론이고 언니와 여동생의 학비 그리고 이 둘의 결혼 비용까지 그녀가 전부 마련해야 해서 그녀의 집안을 위해 열네 살 때부터 단 한순간도 쉬어본 적이 없다며 이런 환경에서 한 시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어 결혼을 선택했다고 밝혀 당시 네티즌들은 이사하를 안타까워했습니다.

이렇듯 사랑해 의한 결혼이 아닌 필요에 의한 결혼은 아시다시피 항상 결론이 좋지 않게 끝나기 마련인데요. 오죽했으면 김한석조차 뭔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예식을 일주일 남겨놓고 파혼 이야기를 꺼내게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둘의 결혼 생활은 4개월이란 연애 기간과 똑같이 4개월의 결혼 생활만 이어간 채 결국 이혼하게 되었는데 이를 두고 대중들은 ‘이상아의 사치 때문이었다’, ‘혹은 김한석의 바람기 때문이었다’ 등의 여러 추측을 내놓았지만 확실한 건 이 결혼은 당사자 모두에게 시련을 안겨준 것입니다.



김한석은 이혼 후에 전 재산이 6000원일 정도로 경제난을 겪었기에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서 밤 무대에 DJ까지 뛰었으며 하루는 밤 무대를 뛰던 중에 취한 관객들이 다가와서는 그가 이사하를 괴롭힌 놈이라며 맥주병과 과일 등을 던졌는데 고맙게도 단 한 명만 자신을 위로하며 이상한 물체를 건넸다고 했는데요.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이 물체는 냄새가 진동하는 인분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도 설상가상으로 부친의 암투병이 시작되자 김한석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극단적 생각을 했다고 밝혔지만 김한석이 대단한 건 이런 울화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 생활을 단 한 번 또 험담하거나 우회적으로 비난하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하든 자신의 입장에서만 얘기하는 것이니 이 생활을 속상하게 하는 것보단 자신이 모든 걸 안고 가는 게 낫다며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헤어진 전 부인의 앞날을 걱정해주었고 이상아역시 여태껏 만났던 세 명의 남편 중에서 김한석을 가장 존경했고 늘 미안한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이런 시련을 겪고도 그녀는 또 한 번 목적에 사로잡힌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것은 바로 두 번째 남편과의 결혼이었습니다. 이 결혼은 이상아가 대놓고 남편의 돈에 이끌렸다고 말할 정도로 두 번째 결혼 때문에 추락한 이미지로 인해 배우로서의 경제적 수입이 줄어들자 또다시 결혼을 탈출구로 삼은 것이었는데요.

장동건의 절친이자 영화사 대표였던 두 번째 남편인 전철은 김한석과 달리 그녀를 공개 비난하였는데 ‘우리 이혼은 전적으로 이상아의 바람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이상한 직감의 이상아의 위치 추적을 해보니 밤 10시가 넘도록 한 남자와 호텔에 함께 있던 게 확인되었다. 같이 있던 상대 남자는 홀아이었고 더욱이 황당스러웠던 것은 바로 장모님의 발언이었다’며 밝힌 적 있으며 장모님은 ‘이런 일은 처음이니 자네가 이해해라 그리고 자네는 거짓말 안 하나’ 라고 말 할정도로 모녀가 너무 뻔뻔하게 행동했기에 이혼은 불가피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상아은 이혼의 사유는 내 바람기가 아니라 전철의 경제적인 문제였다며 반박하였으며, ‘영화사 대표라는 말은 순전히 전부 거짓말이었고 오히려 남편이 친정으로부터 많은 돈을 빌려가서 큰 곤욕을 치렀다 또한 전철의 빚으로 인해 내 출연료까지 차압을 당했고 심지어 8억 가까이 되는 엄청난 빚이 생겨버리기까지 했다.’ 라며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렇게 각자가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는 치열한 갈등을 겪다 보니 이상아는 세 번째 결혼만큼은 목적이 아닌 감정으로 결혼하게 되는데요. 세 번째 남편인 윤기영은 이혼 과정 중 힘들어한 이상아를 그야말로 물심명면 도와주며 의지할 어깨를 빌려주어 이상아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윤기영과 결혼을 치르게 됩니다.

이 결혼은 매번 1년 미만으로 끝나던 그녀의 결혼들과 달리 10년 이상이 지속되며 정말 마지막 결혼같이 보여졌습니다. 하지만 시댁과의 갈등 및 남편 자녀들과의 마찰 그리고 전철과 마찬가지로 윤기영 또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자 이상아는 세 번째 결혼 역시 실패작으로 끝나고야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다룬 그녀의 데뷔 과정과 세 번의 이혼을 본다면 정말 사주팔자가 지독히도 험난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이상아는 사주팔자를 넘어 자신에게 귀신까지 씌인적이 있다고도 밝힌 적 있습니다.

그녀는 열여섯 살이었을 당시 ‘사랑이 꽃 피는 나무’에 출연했는데 그때부터 귀신에 쓰여서 한 달에 한 번씩 눈이 풀렸다고 합니다. 촬영 현장에서 헛소리를 할 정도로 정신을 못 차리던 그녀를 위해 어머니는 목사님까지 부르며 퇴마의식을 치렀고 이 과정에서 많이 맞기도 했지만, 계속 귀신이 보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결국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녀의 동료 배우가 이상아에게 유명한 무속인을 소개시켜 주며 끝까지 치뤘지만 끝끝내 나아진 건 전혀 없었고 심지어는 악귀 중의 악귀라며 도망갔다고 말해 당시 많은 사라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다행히도 지금은 해결됐다지만 그녀 귀신의 씌인 경험 그리고 이혼과 경제난을 계속 겪으며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고 하고 이런 과정들이 단지 이상아 본인의 성격 탓이라고만 할 수 는 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열네 살의 그녀를 소녀가장으로 몰고 걷던 부모의 책임과 더불어 임권택 감독 같은 어른들의 폭력에 의해 그녀가 망가져 그녀가 결혼을 사랑해 최종 목적지가 아닌 자신에 구해서 동아출로 접근했던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수 도 있을 것 같습니다.

김한석의 절친 유재석도 한방송에서 ‘이혼후 임분까지 맞던 김한석은 매일같이 울며 지옥을 겪었다’ 증언 할만큼 정말 힘든 시간들을 보냈을 것 같은데요. 앞으로의 남은 여생들은 행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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