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왜 안보이나 했더니…” 잠적했던 패티김 거역못해 5개월 동안 감금 당한 안타까운 최근 근황

최고의 여가수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는 가수 패티김이 과거 한 인터뷰에서 고백하길 ‘사람들이 나의 이미지를 보고 이것저것 잘 따지고 잘 챙겨서 꽤나 부자일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사실 나는 가난한 유명인사다

내가 가난하다고 하면 누가 믿겠냐만은 가수는 행사를 많이 뛰고 뻔질나게 나다녀야 돈을 만지는데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해서 수입이 뻔하다 지금이 아니라 옛날부터 그랬다 가수의 주수입원은 야간업소 출연인데 나의 전성기 시절에도 밤 무대의 환경이 다소 나쁘지 않았고

유혹도 많았지만 그런데 나하고는 궁합이 맞지 않더라 한 번은 끈질긴 간섭에 업소에 세 번 가량 출연했었는데 하지만 하던걸 하려니 어색해서 곧 그만두었고 이처럼 나는 돌이켜보면 아무리 인기가 있었어도 돈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렇게까지 얘기를 할 정도로 그녀의 인생은 평탄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어릴때부터 잘 울지도 않고 사람들과 다투면 꼭 이겨야 직성이 풀렸다고 하는데요. 이때부터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그리고 그덕에 전국 중고등 국악 부문에서 1등을 할만큼 재능도 있었지만 하지만 당시 “창 배우면 기생된다”는 집안의 반대로 더 이상은 음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미 8군에서 노래를 하게 되었는데 여기저기서 난리가 났고 이내 키가 크고 노래 잘하는 가수가 나왔다는 소문은 미8군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미 8군에서는 최고의 스타의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집안에서는 그녀가 가수 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결국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다른 살림을 차렸던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가장이었던 큰오빠가 그녀에게 “딴따라가 웬 말이냐 집안 망신이다. 당장 그만둬”라는 불호통이 떨어졌고 그때 그녀가 속으로 ‘우리 집안이 이미 쫄딱 망했는데 뭐가 더 망할 게 있냐”는 생각은 했지만, 당시 실질적인 가장인 큰오빠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심지어 집안에서 5개월 갇혀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길옥균과 패티김을 방송사에서 두 스타를 함께 묶는 특집 프로를 기획하게 되었는데 당시 방송사들은 인터뷰를 할 때도 두 사람을 같이 불렀으며 또한 색소폰을 매력적으로 불던 길옥균이 패티김과 함께 공연을 할 때가 많아지다보니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두 사람은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1973년 대한민국 최초로 이혼 발표 기자회견을 가지게 될 정도로 그들의 이혼이 화제가 되었고, 심지어 이혼 발표인데도 사회자까지 있어서 ‘이혼식’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이혼을 하자 당시 패티김이 착한 남편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린 나쁜 여자이고 길옥윤은 불쌍한 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녀가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으며, 또한 길옥윤을 버리고 외국 남자하고 연애하다 헤어졌다는 소문까지 나돌자 패티김은 다시 미국으로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그녀가 비난과 오해 속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어느 날 그녀의 열렬한 팬이라는 외국인이 접근하게 되는데 미국에서 무역업을 하는 이탈리아 출신의 남자로 유머러스하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패티김이 싫어했던 술은 아예 입에 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은 1976년 2월 미국 뉴욕에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패티김이 보석받고 재혼할 무렵 당시 일본에 머물며 침체와 우울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던 길옥윤은 다행히도 다시 의욕을 되찾아 신인 발굴에 나서게 되는데 그때 발굴한 가수가 무명의 혜은이로 음악 인생의 제2의 전성기가 펼쳐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콤비는 서울 가요제 10대 가수 가요제 방송 <가요대상> 등 중요한 상을 모두 휩쓸만큼 아주 대단했고 그래서 한때는 혜은이와 길옥윤의 열애설이 돌았으나 길옥윤이 극구 부인하다가 1980년에는 24세 연하의 여성과 결혼해 패티김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실제 결혼해서 딸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는그러다 1994년 5월 골수암으로 일본의 집앞 계단에서 쓰러져 줄곧 병상에 드러눕고 말았습니다. 당시 이소식을 들은 패티김은 길옥윤을 ‘일본에서 초라하게 하늘로 보낼 수 없다’며 여기저기에 도움을 청했고 그 덕에 길옥윤이 귀국하자 패티김은 또다시 천국 가는날을 기다리고 있는 갈옥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며 1994년 6월 SBS에서 <길옥윤 이별 콘서트> 특별 생방송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손을 쓰기도 했습니다.


한편, 길옥윤이 생을 마감하기전 병상에서 입버릇처럼 나의 곡을 가장 잘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패티김이라고 했고 패티김은 2012년 2월 15일 기자회견에서 1년간 국내외에서 진행될 고별공연을 끝으로 가수를 은퇴하겠다’고 선언을 한 후 그녀의 공연 역시 볼 수 없게 되었는데요. 언젠간 다시 그녀의 노래를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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