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톱 가수 박재란은 ‘산 너머 남촌에는’을 통해 현미, 한명숙과 함께 60년대 여가수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고 당시 수많은 인기곡을 내며 스타들의 스타였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났던 삶을 살았지만 하지만 조명이 꺼진 무대 밖의 인간 박재란의 삶은 시련과 고난 그리고 역경뿐이었다고 하는데요.
두 번의 이혼과 믿었던 동생에게 당한 사기로 전 재산을 다 잃고 심지어 수갑을 차고 감옥까지 가야 했던 그녀의 인생은 우리가 알고 있던 가수 박재란의 삶과 180도 달랐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딸마저 먼저 하늘로 떠나보내는 시련을 겪었으며 설상가상 사위와의 불화로 딸의 무덤조차도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17살의 가수로 데뷔한 박재란은 ‘산 너머 남촌에는’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이후 발표하는 곡마다 히트를 치며 당대 최고의 톱스타로 자리매김했었습니다. 당시 돈도 엄청나게 벌었다던 최고의 스타였던 박재란은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선택으로 당시 수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는데요.
바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녀의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였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달콤한 연애를 하며 결혼까지 했지만, 결혼이라는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특히 첫 번째 남편의 반복되는 사업 실패로 빚을 갚느라고 결혼하고 나서도 그녀는 돈만 벌려고 돌아다녔으며 심지어 남편이 다방여자와 바람펴서 홍콩으로 도망가려고 비자까지 받았다고 하는데요.
이 때 결국 박재란 그녀가 이혼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훗날 그녀는 첫 번째 남편은 자신은 어떻게든 가정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남편이 외도까지 저지르면서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분위기를 말하자면 여자가 이혼한다는 것은 한 번 죽는 거나 마찬가지였는데요.
그녀는 이혼 후 너무도 큰 충격과 우울증으로 당시 정신병원에도 오래 입원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퇴원 후에도 우울한 마음이 도저히 가라앉지 않자 미국 이민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녀의 두 딸도 함께 미국에 데려가려 했지만 첫 번째 남편이 “절대 안 된다. 못 데려간다”고 반대하며 심지어는 딸들을 아예 못 만나게 차단시켰습니다.
그렇게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난 그녀는 미국 한인사회에 행사들이 많다보니 거기서 돈을 다시 많이 벌면서 비교적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미국 활동 당시 영주권이 없었던 그녀는 불법 체류로 걸려 유치장에 가기도 했고 그렇게 영주권 취득을 못하면 추방당할 위기였던 그녀는 다행히 자신을 좋아하는 연하의 남성과 재혼은 해 영주권을 결국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이혼의 아픔을 알기에 두 번째 결혼은 어떡해서든 실패하기 싫어 정말 많이 노력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남편 또한 친구를 잘못 만나는 바람에 나쁜 약을 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나중에는 집에도 안 들어오고 행방불명이 되었고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집에 안 들어오자 자동 이혼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970년 당시 10억원을 미국에 있는 교민에게 사기까지 당하며 결국 바다에 나가서 신발까지 벗고 극단적인 시도도 했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 두고 온 두 딸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미국 생활을 접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박재란은 딸들이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까봐 두려웠지만 다행히 딸들은 전남편의 행실을 알고 있었고 현미가 중간 역활을 하면서 모든 것을 이야기해줘서 자신을 이해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15년 만에 사랑하는 딸과 재회하며 행복을 꿈꿨지만 역시도 너무도 허무하게 깨져버리는데요 둘째 딸인 고 박성신 씨는 지난 2014년에 심장 질환으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마주해야 했던 딸과의 이별은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한편, 그녀가 충북 진천 일대 야산 속 무덤가를 헤매며 딸의 묘를 찾고 있다는 안타까운 내용이 방송을 타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의 묘를 찾고 있다며 사정이 있어서 딸 무덤을 8년째 찾고 있다고 털어놨으며 딸이 어디에 묻혔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당시 박재란은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딸의 영정사진을 보자마자 큰 충격에 정신조차 가누질 못했고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장례 절차가 끝난 뒤였습니다.
이후 조금 회복돼서 사위에게 연락을 하니까 사위는 행방불명으로 지금도 연락이 안된다고 했으며 그런 와중에도 어렴풋이 기억으로 딸의 장지가 충북 진천이라는 것이 들렸던 것 같다고 했고 그래서 그 단서 하나 가지고 8년째 찾으러 다니는거라며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사연이 방송 나간 뒤 제작진은 박성신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의 제보를 받았고 결국 박재란과 함께 박성신의 묘를 찾게 되었는데요. 간절히 딸의 묘를 찾았던 박재란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방송을 통해서라도 딸을 찾아 다행입니다. 그동안 힘들었을 그녀를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