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어떻게 나를 속인거야” 이낙훈이 절친 이순재에게 숨기고 있던 것의 충격적인 실체 이순재 이낙훈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되는 폭로

지난해 유명 탤런트 출신으로 제 10에서 12대 국회의원을 지낸 홍성우가 혈액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연예인 출신 국회의원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는데요.

홍성호처럼 연예계에는 실제로 정치의 출사표를 던지고 의원 활동을 한 인물들이 몇 있습니다.

가요계에 살아있는 전설 이선희는 91년 지방 선거에서 당선되어 서울특별시의회 마포구 의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수 최희준은 96년 제 15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안양 동안 갑구에서 당선된 전적이 있는데요.

문성군은 정치색을 여실히 드러내더니, 민주통합당 대표 권한대행과 더불어 민주당 상임고문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낙훈은 제 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정치계에 입문했는데요.

정치인으로도 업적을 남겼지만 그는 배후로 더 빛나는 삶을 살았습니다.

지병으로 병색이 완연할 때도 연기에 대한 열정을 놓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카메라 앞에 섰는데요.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많은 동료와도 가깝게 지냈습니다. 특히 이순재와 막역한 사이였는데요.

이순재가 이낙훈에게 욕한 사발했던 사연은 유명합니다. 이순재는 이낙훈이 숨기고 있던 것들이 수면에 드러났을 때 한사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는데요.

욕을 하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폭로를 멈추지 않아 놀라움을 자아냈습니다.

대체 이낙훈은 이순재에게 무엇을 숨겨왔던 걸까요? 오늘은 생전 이순재와 막역한 사이였던 이낙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36년 경기도 경성고 아현정 현재 서울특별시 마포구 아현동에서 태어난 이낙훈은 유복한 집안의 아들로 아주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국민학교 재학 중 46년 10월 KEBS 어린이 라디오곡 돌돌이의 모험에서 이대 봉람이 역을 맡아 연예계에 발을 들였는데요.

학교 일기에서는 모마 역까지 맡으며 화려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가 경기중학교에 재학하던 때인 50년에는 6.25 전쟁이 발발하며 전 국민이 힘들어하던 시절이었는데요.

북한군에 의해 이낙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집안 갓에도 덩달아 기울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련도 연기에 대한 그의 열정은 막지 못했는데요.

이낙훈은 피난 당시 경기고등학교에 재학하며 연극 무대에 섰습니다.

그 때문에 이낙훈는 교내의 유명인이 되었지만 학업을 게을리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낙훈은 고등학교를 졸업 후 연세대 영문과 시험에 합격했는데요.

하지만 천주교 신도인 어머니의 반대로 다시 서울대학교 미학과 시험을 치렀고 한 차례 낙방 후 54년에 합격해 서울대학교 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57년에는 미국마이의 이미 대학교 사학과에서 공부하며 유학 생활을 했는데요.

명문대 미국에서 유학까지 했던 사실 때문에 그가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으나 이낙훈은 앞서 말했듯 6.25 때 아버지를 여의고 넉넉지 못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이낙훈은 미국 유학 시절에도 접시 닦기 등궂은 일을 해 번 돈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스스로 학비를 벌었었습니다.

그리고 졸업 후 실험 극단 발코니에 입단해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귀국 후에는 극단 드라마 센터의 개관 공연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배우의 삶을 걸었습니다.

뒤이어 실험극장에 입단한 이낙훈은 김순철 오연경 황은진 김성옥 등과 인연도 맺었는데요.

훗날 오현경관은 이순재와 더불어 시대를 대표하는 원로 배우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리고 이낙훈은 62년 KBS 개국대 티비 탤런트와 함께 외화 번역을 시작했는데요.

미국에서 유학까지 마친 영어 능통자였던 그는 600만 불의 사나이 형사 콜롬보 같은 미국 드라마를 포함해 외화 처녀 편을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김무생 이순재 등과 함께 초기 TBC 간판 배우로도 활동했는데요.

실제로 이낙훈과 이순재는 매우 절친한 관계였습니다. 34년생 배우 이순재는 현재 대한민국 최고령 현영 연예인으로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요.

그는 서울대학교 철학과 54 학번으로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다녔던 이낙훈과 함께 초 엘리트 배우로 손꼽힙니다.

그 역시 이낙훈처럼 입시에 한 번 실패 후 재수해서 서울대에 입학하게 되었는데요.

두 사람은 그런 공통점으로 순식간에 가까워졌습니다. 이순재와 이낙훈은 서울대 연극회를 재건해 활동하기도 했는데요.

일로 이순재는 배우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순재는 MBC 무릎학도사에서 이낙훈과의 일화를 소개한 적 있는데요.

기수상 자신이 후배였고 이나큰이 또 원체 노안이었던 터라 이순재는 그를 형이라 부르며 늘 깍듯이 모셨습니다.

하지만 이낙훈은 36년생 이순재는 34년생으로 실제로는 이순재가 이낙훈보다 두 살이나 많았는데요.

두 사람은 어느 날 사주를 같이 보러 갔다가 서로의 진짜 나이를 알게 되었고 이순재는 그동안 속아왔던 분함에 자리에서 욕한사발 퍼부은 다음 바로 말을 놓고 친구가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그 이후로 더 가까워진 두 사람은 연기뿐 아니라 인생에 많은 것을 공유했는데요. 이순재는 이낙훈이 정치에 출사표를 던졌을 때 같이 민정당에 입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낙훈은 81년 권정달의 권유로 정치권 진출을 시도해 제 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후보로 나가 당선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임기 4년 동안 국회 문공위원 유네스코 한국위원의 위원 등을 지냈는데요.

영화법 개정 공연법 개정 등에 참여하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당신은 원로 배우들이 정계 진출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배우들의 유명세를 이용하려는 정당들의 의도가 있었고, 때문에 정계 진출을 했다가 쓴맛을 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정치의 정자도 모르면서 그저 권력에 눈이 멀어 진출했다가 딴따라라며 은근히 배척당하고 당연히 좋은 성적을 못 내는 인물들이 많았는데요.

이낙훈은 서울대 출신의 엘리트에다 비상한 머리까지 있었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성실함으로 정치인으로서도 꽤 많은 업적을 이뤘습니다.

하지만 정치에 계속된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지 이후 탤런트로 복귀하였는데요.

사실 그는 요직에 앉았을 때도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배우로서 제일 빛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낙훈은 서울 출신이면서도 영원함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항상 연기자로서 굉장한 자부심을 품고 활동을 했습니다.

또한 그는 87년에는 영화제작 수입사 현대필코를 세워 사업에 도전했는데요.

90년에는 외화수입사 범진영화사도 세웠으나 아쉽게도 사업적인 성적은 좋지 못했습니다.

사업하면서 크게 신경 썼던 탓인지 그는 혈관 수술까지 받는 등 잠깐 위기에 봉착했는데요.

그 이후로 건강 관리를 잘해 91년에는 KBS 드라마 옛날에 금잔디에서 칠순이 넘은 천직 교사 역을 맡아 혈연했습니다.

이 드라마로 그는 KBS 일일 연속극의 부활을 이끌어내 KBS 연기 대상까지 받았는데요.

그 뒤에도 배우로서 연기에 계속 전념해 91년부터 4년간 모계인 경기고 연극반 출신들이 만든 하동연 의회 초대 회장을 맡는 등 건강을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98년 10월 연극 대한국인 안중근에서 홍석구 신부 역으로 출연을 앞두고 갑작스러운 호흡곤란 증세로 입원했는데요

이후 지병인 당뇨병 등의 합병증까지 한 번에 겹쳐와 회복의 기회를 놓쳤고 결국 98년 10월 7일 62세에 이른 나이에 별세했습니다.

그는 배우로서도 정치인으로서도 맹활약을 펼쳤기 때문에 그의 빈소에는 많은 연예계 인사들과 정계 인사들이 조문을 왔는데요.

동료 연예인들은 물론 전두환 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을 포함한 많은 정치인들이 조안을 보냈습니다.

연예계에 큰 별이 지며 많은 동료들이 슬픔을 감추지 못했는데요. 그의 빈소에는 오랫동안 추모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이낙훈은 지병을 앓고 있는 중에도 브라운관에서 시청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는 순풍 산부인과에서 박영규의 아버지 역으로 세상을 떠나기 두 달여 전에도 열연을 펼쳤는데요.

그때 함께한 선우용녀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극중 미다리를 안아야 하는 신이 있었는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 힘이 없어 안지를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힘을 못 쓸 정도로 병색이 완연했던 건데요. 고인은 그만큼 힘든 상황에서도 연기에 혼을 불태웠던 배우였습니다.

이낙훈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팔자취로 후배들은 그를 영원히 기억할 텐데요.

지금 있는 그곳에서도 분명 바쁘게 지내고 있을 이낙훈 하늘에서 못 다 이룬 꿈 모두 펼치며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라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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