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옥 별세 후 견디지 못하고 결국…” 71세 오승근 김자옥 별세 후 전해진 안타까운 근황 모두가 오열한 이유

오승근 씨는 1951년 12월 21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 이 학년 때인 1968년 홍순백 씨와 함께 트웨이스를 결성해서 데뷔했죠. 그러다 1971년 홍순백 씨와 결별하고 영예이스라는 그룹사운드에서 활동하다가 군 입대로 잠시 활동을 쉬게 됩니다. 1974년 군 복무를 마치고 임용재 씨와 함께 금과 은이라는 그룹을 결성하게 됩니다. 오승근 씨가 금이었고 임용재 씨가 은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국어 수나 운동 때문에 할 수 없이 우리나라 말로 그룹 이름을 짓게 되었다고 하죠. 이때 빗속을 둘이서 라는 곡이 큰 인기를 얻게 되고 다음 활동인 9000 여 뱃사공 역시 크게 성공하게 됩니다. 쥐알의 악기화하 장희진 등의 곡으로 더 큰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장희진은 원래 황정자 씨의 곡이었으나 금과 은이 이를 메이크업하면서 원곡보다 더 큰 인기를 얻었고 연말에 MBC 10대 가수상 등을 휩쓸었습니다. 그러나 금과 은이 1980년에 해체된 후 오승근 씨는 솔로로 전향하게 되고 이후 1984년에 이혼 경험이 있었던 김자옥 씨와 재혼하게 됩니다. 오늘은 두 분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봅니다. 그러면서 고인이 된 김자옥 씨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있는데요.

김자옥씨는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난 이남 오 녀 중 세 번째 자식이었습니다. 아버지 김상화 씨는 중앙극장에서 고문 역할을 하며 동시에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독한 낭만주의자로 가정 경제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고 오로지 음악회에 다니고 시를 쓰는 등 감상에만 빠져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북 출신의 생기가 넘치는 어머니가 식당을 운영하며 억척스럽게 살림을 꾸려나갔습니다.

젊었을 적엔 엄청난 미인이었던 어머니는 남편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한평생 그를 미워하며 하소연을 자식들에게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가정불화가 김자옥 씨의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우울하고 내성적인 아이로 자라났습니다. 이런 현상은 20대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40대 후반에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되어 아무것도 못 하게 되자 배우가 된 김자옥 씨는 실질적으로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게 됩니다.

김자옥 씨는 20대 때 온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때 배우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아니라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겉으로는 엄청난 이름을 날리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아파서 누워 계시고 어머니는 맨날 한숨을 내쉬는 집안 모습에 우울한 20대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살면서 무엇하나 하는 염세적인 생각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밖에서는 마냥 밝고 행복한 모습으로 지냈습니다.

김자옥 씨는 어렸을 때부터 아동극을 시작으로 많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아역배우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인으로 탤런트가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인 1970년 MBC 탤런트 일 기생으로 들어가면서부터입니다. MBC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다가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면서 잠시 브라운관에서 떠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년 뒤인 1971년 KBS 심청전에서 스카우트되면서 본격적인 탤런트로 대비하여 1년 만에 정상급으로 올랐습니다. 붙임성이 있고 삼양에서 동료 탤런트들 사이에서 귀염둥이로 통하는 김자옥씨는 하위 스틴스타로도 활약해서 1970년대의 티비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함에 따라 안방극장의 트로이카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주로 드라마에 많이 출연한 배우로 알려져 있지만 영화에도 많이 출연했습니다.

흥행 기록만 놓고 보면 당대 트로이카인 정윤희 씨와 유지혜 씨를 제칠 정도의 기록을 보유했습니다. 또한 목소리도 좋아서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도 진행했습니다. 데뷔 때부터 외모뿐만 아니라 연기력까지 훌륭하다고 호평받았을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던 탑 오 부 더 탑 여배우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피가 어디로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낭만주의자였고 김자옥씨는 사랑 지상주의자였습니다.

다른 듯하지만 닮았죠 김자옥 씨의 레벨로 보면 재벌가와 결혼해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었는데 그녀는 돈보다 사랑을 쫓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신인에 불과한 체100호 씨와 1980년 결혼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3년 만에 아이가 없는 상태에서 헤어지게 되죠. 두 사람이 성격 차이로 헤어졌다고 밝혔는데 그 말이 맞을 것 같습니다. 후 김자옥 씨가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수 오승근 씨를 만나게 됩니다.

과거 연예인 머리를 많이 해주던 명동 유지 승미용실에 오승근 씨가 파마를 하러 갔다가 우연히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거죠. 그리고 유지승 씨의 주선으로 식사 자리를 가지게 되며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합여 배우의 사랑은 금방 스캔들이 되어 퍼지게 되었고 솔직한 김자옥 씨는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결혼하자고 해서 만난 지 3개월 만에 초스피드로 결혼을 합니다.

이 당시 오승근 씨는 잊혀져가는 가수였는데 가장 탑클래스 여배우인 김자옥 씨는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사랑 하나만을 생각하고 결혼합니다. 이때 오승근 씨는 전처와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4년이 되도록 오승근 씨와 김자옥 씨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다가 간절한 기도 끝에 드디어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슬아 일 남 일 녀를 두고 연예계 대표 원앙법으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1990년대 이후 김자옥 씨는 예능 프로그램에도 종족하여 나왔는데 1996년 MBC 코미디 프로그램 소늘은 고운 날 돼서 공주병 여고생 컨셉으로 출연해 데이트를 했습니다. 여세를 몰아 1996년 말에는 태진아 씨의 도움으로 공주는 외로 라는 곡으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화려한 드레스와 팔목 장갑을 끼고 머리에는 왕관을 쓴 공주 복장으로 노래하며 활동했는데 그의 전성기가 되었습니다.

앨범은 팔리며 히트를 쳤고 이 노래를 통해 당시 우울증 등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1998년 IMF 때 오승근 씨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당시 돈으로 7억이 아닌 무려 70억의 빚을 지게 됩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거의 다 이혼을 하며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겠지만, 김자옥 씨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씨가 이제 그만 이혼하자고 했지만, 김자옥 씨는 이후 나지 않고 더 열심히 일했고 남편 오승근 씨에게 다시 노래하기를 권했습니다. 그렇게 오승근 씨는 프로 가수로 전향하여 혜진아 시에 곡을 받아 2001년 있을 때 자례로 재기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애파워 팔 키트로 가수 반열에 이름을 올린 오승근 씨는 후 십여 년 만에 내 나이가 어때서를 통해 드디어 제 이 의 전성기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괜찮소 사랑의 말을 간보다 신랑을 택한 김자욱 씨는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가족을 지켜내 듣고 결국 남 편까지 다시 일어서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과정이 힘들었던지 김자옥 씨는 암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2008년부터 투병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 대장암 진단을 받았지만 수술과 항암 치료를 받고 회복되어 다시 연예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이때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드라마 영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활동을 거의 쉬지 않았습니다. 후 2013년 말 꽃보다 누나에 출연하면서 화제를 모았는데 그동안 암수술과 공황장애 등을 치료하며 꽤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밝혔습니다. 2014년 봄 그녀의 마지막 출연 프로그램 세 번 결혼하는 여자가 종영한 후 한동안 휴식기를 가졌는데 사실전에 발병했던 대장암이 폐와 임파선 등 다른 장기로 전이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마지막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 머리가 다 빠지자 투병 의지를 많이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연락도 받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너무 아프면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런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실 처음 암 진단을 받은 후 회복하고 방송을 할 때는 몸이 많이 좋아져서 아프지 않았고 그래서 암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암이 전이 되어 항암 치료를 하며 크게 힘들어졌던 것이죠. 그리고 급속히 악화되어 아들의 결혼을 불과 4개월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의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김자옥 씨는 중환자실에 들어갔는데 의사가 그녀가 말은 못해도 들을 수는 있다며 오승근 씨에게 마지막 얘기를 하라고 당부합니다. 오승근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뭐 걱정하지 마 여왕이 내 같아 참가번호거나 모든 건이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그것도 하지 말라고 그리고 파니야라 김자옥씨는 눈을 감고 있다가 힘겹게 눈을 떠서 천천히 두 번 깜빡 한 번 파악했습니다.

2014년 11월 16일 63세 생일을 맞이한 지 겨우 3일 만에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가슴이 아픔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밝은 모습에 그녀의 암이 완치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충격이 더했습니다. 오승근 씨는 최근 서울을 떠나 분당 신도시로 이사했는데 그녀의 납골당해서 매우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마음이 더 쓸쓸해져서 최근에는 분당을 떠나 탁 트인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청주의 한 야산 근처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아내를 떠나 보낸 지 7년 된 오승근 씨는 연고도 없는 청주의 보금자리를 꾸려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암투병 중에도 끝까지 연기를 놓지 않았던 김자옥 씨를 위한 추모관을 선물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생전 아내가 좋아했던 무대 위 가수로서의 도전도 멈추지 않고 청주와 서울을 오가며 신곡 준비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솔직했던 김자옥 씨에게 환한 웃음과 추억은 아름다웠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사랑하는 부모님과 큰언니 그리고 남동생 김태욱 전 아나운서와 함께 행복하게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