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배우 남궁원은 9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년 전부터 폐암으로 투병하며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결국 오늘 서울 아산병원에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냈습니다. 남궁원의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으며 바리는 8일 후 9시 30분에 경기 포천광릉추모공원에서 이뤄질 예정입니다. 고인의 뜻에 따라 장례는 가족장에서 진행될 것입니다.
현재 빈소에서는 남궁원의 아들인 홍정욱을 비롯한 가족들이 슬픔에 잠긴 가운데 배우 신영규는 남궁원 별세 소식을 듣고 우리 세대의 남궁원이라고 하면 윤일봉 신성일과 함께 최고의 미남으로 꼽히던 라며 대한민국을 대표했던 배우 중 한 명이었다. 생긴 것처럼 연기도 멋지게 잘했다고 고인을 회상했습니다.
1934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난 남궁원은 젊은 시절 대학교에 갓 입학한 그에게 미남이란 소문이 퍼지면서 영화계에서는 그를 배우로 적극 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남궁원의 어머니는 아들이 의사의 길을 걷기를 희망했습니다. 의학 분야가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느낀 남궁원은 한양공대에 진학하여 유학을 준비하게 되고 콜로라도 주립대학에서 제공하는 전액 장학금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 교수를 목표로 했으나, 어머니가 자궁암 삼 기로 진단받고 투병하게 되자 상황은 급변합니다. 당시 의료진은 수술로도 회복이 어렵다고 진단했지만, 남궁원은 어머니의 치료를 위해 동창의 아버지이자 영화사 대표인 이재명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배우로서 활동하기로 결심하고 상당한 금액을 받게 됩니다. 그 금액을 어머니의 치료비로 전부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어머니는 3개월 후 세상을 떠나십니다.
남궁원은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병풍 뒤에 숨어 어머니를 꼭 안고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어머니의 다리를 만지면 뜨끈뜨끈하게 느껴졌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뜨겁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는 3일 동안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어머니를 계속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척들은 남궁원을 보며 이 아이는 죽을 거야라고 말하며 어머니가 데려가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남궁원을 떼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남궁원은 절대 떨어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5일 동안 어머니의 곁에서 지냈습니다. 남궁원은 나중에 후회를 토로하면서 당시 9월 초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시신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너무나 어머니의 잃어버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였으며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바로 그다음 날에 영화사에서 촬영 날짜를 잡았고 남궁원에게 참여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이미 돈을 받았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남궁원은 아버지와 상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제비 에미가 죽어도 무대에서 그걸 못 멈춘다고 말했으며 결국 남궁원은 배우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초기에는 배우가 될 생각이 없었지만 운명이 그를 영화계로 이끌었습니다.
결국 몇 년이 지난 후 남궁원은 신상옥 감독이 설립한 신필름의 전속 배우가 되어 스타의 반열에 오릅니다. 남궁원은 신상옥 감독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추모하며 그와의 오랜 작업 관계를 회고합니다. 처음에는 화려한 외모에 비해 연기력에 대한 비판도 받았으나 지속적인 노력 끝에 연기에서도 인정받는 배우로 거듭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당시 인기 있던 여배우 도금과의 교제와 동거까지 이르렀으나 두 사람은 결국 도금이 자녀의 미래를 걱정한 이유로 결별하게 됩니다.
당시 대한민국 영화계는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남궁원의 멋진 외모와 건장한 체격을 활용할 만한 드물었습니다. 그는 캐스팅에 있어서 운이 따르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한국 영화계에 변화하는 세대 사이에서 낀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1928년생인 신영규는 한국 남자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대표하며 현대극과 시대극을 넘나들며 활약했고 1937년생인 신성일은 젊은 시절에는 반항적인 청년 이미지로 나이가 들어서는 고뇌하는 지성인 역할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두 배우 사이에서 남궁원은 독특한 외모와 매력에도 불구하고, 이들만큼 주목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60년대와 70년대에 협객과 건달 영화가 유행할 때 귀족적인 외모를 지닌 남궁원에게는 이러한 장르가 잘 맞지 않았습니다.
서구적인 매력과 큰 키를 갖춘 그는 양복을 잘 소화하는 모습으로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남궁원은 자신이 평생 근대복을 입고 연기할 기회가 없었던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당시 007시리즈를 모방한 스파이 영화가 제작되면서 그가 제임스 본드를 연상시키는 스파이 역할을 맡기도 했으나, 이러한 작품들은 충무로의 주류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현은 남궁원의 이러한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그가 10년 혹은 15년 뒤에 태어났다면 더 큰 성공을 거뒀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남궁원은 당시 다른 배우들과 달리 무대에 오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아들 홍정욱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학비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남궁원은 결국 무대에 서는 것을 포함한 다양한 활동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당시 영화배우들에게는 영화 촬영만으로는 큰 수입을 얻기 어려웠습니다.
남궁원의 경우 두 딸이 각각 미국과 독일로 유학을 가고 부인까지 유방암 진단을 받으며 가정의 경제적 부담이 커졌습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느낀 그는 어떤 무대라도 가리지 않고 출연하여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전국을 돌며 공연을 하고 나면 몇천만 원의 수익이 생겼으며 그 돈은 대부분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졌습니다. 어느 날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을 방문한 아들 홍정욱은 반모에 출연한 아버지 남궁원의 포스터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로지 영화 활동만 해왔던 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홍정욱은 이에 대해 아버지에게 죄송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남궁원과 그의 아내는 공동으로 시에프 출연 제안을 받았었으나 계약 후 아내가 유방암 진단을 받아 고난의 시기를 겪게 됩니다. 아내가 수술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CF 촬영에 임했는데 이는 남궁원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와 같은 나이였기에 그의 걱정은 더욱 커졌습니다.
남궁원은 아내의 수술이 10시간 넘게 진행되는 동안 가족을 위한 그의 깊은 사랑과 걱정으로 눈물을 흘리 풀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가족을 위해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그중에는 어린이를 위한 외계에서 온 올해 시리즈와 로봇 태권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궁원은 1970년대에 서울 명동의 빅고이라는 이름의 햄버거 가게를 열어 한국 최초의 햄버거 가게를 선보였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햄버거는 미군 부대에서만 접할 수 있는 생소한 서양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햄버거가 당시 한국인의 입맛에 맞지 않아 사업은 이 년도 채 되지 않아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남궁원의 실현은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언론 매체는 남궁원이 명예회장으로 있던 한 기업이 의료기 임대 사업에 투자해 투자금에 대해 30%에서 250%까지의 배당금을 약속하며 1년 동안 약 3100여 건의 피해를 초래한 다단계 사기사건을 보도했습니다.
남궁원은 중국으로 출국한 뒤 귀국하지 않아 도피 중인 것으로 간주되어 경찰에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그는 자신도 사건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한 회사가 집에 의료기를 설치해주고 대신 홍보해달라고 요청했을 뿐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해명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오해가 많았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서 남궁원의 손녀가 마약 밀반입 혐의로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당시 19세였던 손녀는 여행용 가방과 주머니에 대마 등 마약류를 숨긴 채 인천공항을 통과하려다 세관검사에서 발각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손녀의 아버지인 홍정욱은 모든 책임이 자신의 교육 실패에 있다며 공개적으로 사과했습니다. 배우 남궁원의 건강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이 년간의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영균과 이해령 회장은 남궁원과의 연락이 두절된 상황을 확인하고 병원에 문병을 부탁했으나, 결국 순운을 떠났습니다.
남궁원은 어머니의 이름과 억울한 사기사건 가족 범죄와 건강 악화 등 다양한 어려움을 겪으며 연기를 했고 평생대우로 활약했습니다. 그의 고통 속에서도 책임감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온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제 남궁원은 평안히 쉴 곳을 찾았으면 하며 고인의 명복을 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