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인생이었다” 가수 이수미 폐암 투병 중 세상을 떠난 안타까운 소식 이수미 그동안 아무도 몰랐던 억울한 심정 밝혀져 모두가 오열한 상황

여고 시절 등의 히트곡을 부른 1970년대 인기 가수 이수미 씨가 폐암 투병 중 69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3일 유족과 가요계에 따르면 이수미 씨는 지난해 12월 에 폐암 삼 기 판정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하던 중 별세했습니다. 이수미 씨는 투병 중이던 지난 5월에도 신곡 별이 빛나는 밤에를 발표하는 등 이수미 씨를 추모하며 그의 발자취를 함께 더듬어 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1952년 1월 25일 전남 영암에서 팔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이수미 씨의 본명은 이 화자입니다. 어릴 적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고 끼도 상당했습니다. 영암 낭주중학교를 거쳐 목포여고를 졸업했으며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69년 목4KBS 노래자랑 대회에 나가 5주 연속 우승을 했습니다. 당시는 학생 신분이라 언니들 옷을 빌려 입고 가발을 쓰고 참가해야 했습니다.

이듬해 목포 MBC가 개국한 후 연말 노래자랑 결산방송에 나갔다가 오아시스 사장과 운명처럼 만났습니다. 1970년 이수미 씨는 서울로 상경해 가수 수업을 받았고 1971년 때늦은 호예지만으로 정식 데뷔합니다. 시골 출신 신인 가수이던 이수미 씨는 1972년 김영광 씨의 여고 시절을 부르면서 대박을 터트립니다. 이 곡은 학교 졸업 시즌을 노리고 기획되었던 곡인데요. 이수미 씨가 이 곡을 하게 되기까지 많은 노곡절이 있었습니다.

작곡가 김영광 씨는 오아시스 레코드의 전속 가수 모두에게 여고 시절을 불러보게 했습니다. 막내였던 이수미 씨에게는 마지막 차례가 주어졌습니다. 이수미 씨의 노래를 들은 김영광 씨는 만족 욕감을 드러내며 자리에서 이 곡은 너가 주인이라고 낙점했습니다. 같은 해 2월 여고 시절을 타이틀곡으로 한 이수미 씨의 첫 독집 앨범이 발매됐습니다. 교복을 착용한 이수미 씨가 커버 사진을 장식했었는데 예상대로 여고 시절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합니다.

때마침 졸업시즌과 겹쳐 라디오 등 방송 매체에서 매일같이 흘러나왔습니다. 이 노래를 부른 이수미 씨의 인기도 하늘로 치솟으며 연말에 MBC 10대 가수상 7대 가수상을 연이어 거머쥐며 최고의 하늘을 보냅니다. 신인 가수가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대의변을 연출했던 것이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는 이수민은 당대 인기 여가수 정훈이 김태희와 함께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하며 스타덤에 올랐다고 평가했습니다. 여고 시절의 인기는 영화 제작으로도 이어졌습니다.

그해 10월 강대성 감독의 동명이었습니다. 영화가 개봉되었고 3만 명이 관객이 몰리면서 흥행에 성공을 거둡니다. 이수미 씨는 1973년에 신곡 조용히 살고 싶어를 발표하며 인기 몰이를 이어갑니다. 그러나 그해 큰 시련이 찾아옵니다. 여름날 이수미 씨는 군산 서해 방송에서 주최한 공개방송에 출연한 후 충남 대천 해수욕장으로 옮겨 친구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인건 대천 평화여관에 투숙했었는데요.

이날 밤 이수미 씨는 수영복 차림으로 혼자 해수욕장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이때 누군가 왼쪽 어깨를 툭청 돌아보는 순간 복부에 따끔한 통증을 느끼며 해변에 쓰러졌습니다. 까만 수영복에 감색 티셔츠를 입은 괴아는 이수미 씨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어둠이 깔린 해변 임파 속으로 뛰어 달아났습니다. 몸에서 피가 흐르자 이수미 씨는 사람 살려라고 외척 주변에 있던 남성이 부축해 해수욕장 내 의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후 대천읍내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았습니다.

오른쪽 하북부를 길이 15 센치 깊이 일 센티 정도 찔린 상태였습니다. 담당의사는 면도날 같은 예리한 흉관 찔린 것 같다라며 10일 정도 치료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전국이 발깍 뒤집혔습니다. 최고 인기 가수의 피습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고 덩달아 분노하는 목소리가 높다 봤습니다. 관할경찰서는 대천지서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본격 수사에 나섰습니다.

경찰은 해수욕장 불량배나 시정관계에 의한 범행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뒀습니다. 그런데 이수미 씨는 진술을 번복하고 세상을 떠나고 싶은 심정으로 내가 한 짓이다라며 말을 바꿉니다. 여러 정황상 이수미 씨의 말은 석영치 않았었는데요. 언론은 자신이 했다는 이수미 씨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는 보도를 내놓기 시작합니다. 1975년 서울지검은 이수미 씨를 소환해 이 사건이 가해였음을 밝혀냅니다.

그는 검찰 신문에서 당시 대천사고를 자기가 한 것이라고 한 부분은 가수로서 더 이상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고 매니저 등 주위 사람들이 경찰 수사로 너무 시달린 데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하루 빨리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밝혔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 숱한 루머만 양산한 채 범인을 잡지 못하고 미제로 남고 말았습니다. 한창 잘나가던 이수미 씨는 대천 피습 사건으로 침체기에 접어듭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살고 싶어를 통해 반전을 꾀하지만 팬들이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수미 씨는 다시 김영광 작곡의 내 곁에 있어 주를 발표해 재기에 완벽히 성공합니다. 1975년 MBC 10대 가수상과 TBC 최고 여자 가수상을 수상하며 제 이의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가까스로 제기한 이수미 씨는 가요계에 불어 닥친 불법 흡연 파동으로 인해 또다시 발목이 잡힙니다. 그는 이 사건에 휩쓸리며 방송과 업소 등의 7년 동안 활동이 금지되는 등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수미 씨는 나는 불법 풀은커녕 담배도 못 피운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약을 피우는 연예인들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처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수미 씨는 지인이 수미야 너 명단이 올라왔어 그러더라 놀리지 말라고 했는데 경찰서에 갔다 나 그런 거 없었는데요. 했지만, 요즘과 달리 검증하지 못했다라며 말을 아꼈습니다. 이수미씨는 피운 사람들과 같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지목이 됐다.

지금이야 검사를 하면 그만인데 시대에는 그게 없었으니까 라며 그때 당시 경찰이 같이 있던 사람 세 명만 말하면 형량을 줄여줄게 라고 했고 경찰이 잡혀 잡힌 사람이 아참 이수미도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 별명이 아참이라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이 일로 이수미 씨는 억울한 심정으로 훈방 조치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건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수미 씨는 누가 내가 잘되는 게 싫었나 보더라 프서가 들어왔고 불구석으로 바뀌었다며 이후 동료들이 가수들이 쇼쇼쇼라는 프로그램에 나갔는데 반성한 기미가 없다고 했고 그다음 날 신문에 무기한 연기로 보도된 가수 직업이 즐겁게 사람들이 앞에서 노래해야 하는 것인데 그럼 소복 입고 울면서 노래했어야 했나라고 말했습니다. 여 차라리 감옥에 가서 지냈으면 개월 수라도 정해졌을 텐데 라고 지난 세월을 한탄했습니다. 이후 이수미 씨는 생계를 위해서 어제는 백화점에서 근무하고 해가 지면 밤무대에 올라 생활했다고 합니다.

이수미 씨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다른 사람들로 인해 이런 고통을 받았다고 사실이 못 견딜 만큼 힘들었지만 가족만을 생각하며 버텼다고 합니다. 그렇게 1980년이 되어서야 활동 규제가 풀리며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오공 시절인 1983년 이른바 사회정화운동으로 또 한 번 출연금지를 당하게 됩니다. 이수미 씨는 그때 모든 걸 내려놨다 20년을 아소리 한 번 안 내고 살다 보니 어느 날부터 말 나오지 않았다며 실어증 환자가 됐던 사연을 고백했습니다.

어머니가 노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랬어요라고 눈물을 글썽인 이수미 씨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서 기한 없이 보낸 시절 정말이라며 절규했습니다. 이후에도 끊임없이 제기를 꿈꾸었지만 추진위원회의 징계로 번번이 좌절되었고 1984년 마침내 티비 무대에 설 수 있었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섰던 생방 그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5분여 동안 임명했습니다. 눈만 벙긋거리며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이수미 씨는 싱글로 중학교 3학년이었던 딸을 입양하였고 지금의 남편 배제동 씨와 만나 결혼했습니다. 배제동 씨가 데려온 딸까지 각기 다른 상처를 가진 내사를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딸과 어머니 묘소를 찾은 이수미 씨는 노래하면서 힘든 것만 보셔서 노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너무 힘든 걸 옆에서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라며 눈물을 보였었습니다.

1971년 때 늦은 후 데뷔한 가수 이수미 씨 여고 시절로 가요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이수미 씨는 지금 봐도 가여워서 눈물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냐라는 질문에 이수미 씨는 아니 싫어요. 그럼 또 겪을 거 아니에요라며 쓸쓸한 답변을 했습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영면에 든 이수미 씨가 그곳에서는 이제 편안히 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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