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오현경 씨가 향년 88세로 별세하셨습니다. 1987년 드라마 손자병법의 2장수 역할로 큰 인기와 명성을 얻었는데요. 사실 고인이 가장 사랑했던 무대는 연극이었죠. 무려 60년 넘게 연극 무대를 누벼온 대한민국 최고참 배우이자 연극 영화 드라마까지 모두 섭렵했었죠.
고인은 식도암 위암 등 암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2008년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와 제2의 전성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무대로 돌아올 수 없게 만든 치명적인 일을 겪게 되며 사랑하는 연극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되자 그만 희망을 잃어버리게 된 것 같아요. 지금부터 고인의 치열한 연극에 대한 사랑으로 점찰된 삶을 추모하며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뭔지 전해드립니다.
오현경 씨는 1936년 서울 출생입니다. 오용목 씨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한국 현대시 발전에 기여한 시인 5일도 씨의 손자이기도 하며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습니다. 어느 정도로 유복했냐면요 조부모는 원래 경상북도 영양에서 천성 농사를 짓는 지주였는데요. 서울로 2주해서 일반인들은 꿈도 못 꾸는 25 칸짜리 큰 집을 안곡동에 마련했고 그곳에서 어린 오현경은 아주 밝고 쾌활한 성격으로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했어요.
제동초등학교 서울중학교를 거쳐 당시 손꼽히는 명문고등학교인 서울고등학교와 명문대학교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엘리트 출신이죠. 초등학생 때 학예회에 출연하기도 했고 중학생 때 재미있게 연극 관람을 하며 연극의 매적에 빠져서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명문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공부를 너무 잘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기가 죽고 공부에 흥미가 떨어지게 되었고 오히려 연기에 더 끌리게 되었어요. 급기야 고등학교 이 학년 때는 주도적으로 연극부를 만들어 연기 시작 고 삼 때는 한국 연극학회에서 주관하는 전국 남녀 중고교 연극 경연대회에서 개인 연기상을 타며 더욱 열의에 불타올랐습니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게 됐는데 연세대학교에 연극을 전공하는 과가 없어서 그나마 가장 연극을 하기에 가까운 전공이라고 생각하고 국문과에 들어갔습니다. 훗날 그는 연세대에서 무엇을 전공했느냐는 질문이 오면 연극을 전공했다라고 답할 정도로 연극에 올인했습니다. 오현경 씨는 천성이 장난치는 것을 좋아해서 대학 때부터 전설로 내려오는 얘기들이 많다고 해요.
그리고 1학년 오리엔테이션 장기자랑대회에서 당시 유행하던 체리핑크 만보를 불러 인기를 끌어 응원단장은 3학년이 하는데 1학년 때 응원단장으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아름다운 복사꾼 귀엽게 변할 적에 또한 연대에서 연극으로 유명해진 스타에서 오현경 씨를 모르면 가짜 대학생으로 판별하는 기준으로 삼기도 할 정도 연대를 다니면서 매년 연극을 하며 무려 십여 판의 작품에 출연 연극하느라 너무 바빠서 대학생 시절 여대생이랑 데이트를 한 번도 못 했다고 해요.
대학 졸업 직전 취직을 할까 연기를 할까 몇 개월 고민하다 결국 극단에 입단했습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연극회 회원들을 주축으로 창단된 실험극장이라는 극단에 들어가서 활발한 연극 활동을 펼쳤습니다.
허생전이 특히 흥행에 성공했는데 장사진으로 줄이 기 늘어설 정도의 인산일에나 기마경찰까지 동원됐을 정도로 인기 괄록의 대배우 오현경 씨는 특히 연극을 사랑하는데요. 연극의 매력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연극을 오래 하다 보면 연기를 하면서 관객을 느끼고 이게 된다고 관객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다고 40대까지도 본인의 직업을 배우라고 못했다고 해요.
감히 내가 어떻게 배우라고 할 수 있냐 하고 관객과 감정의 교류를 즐기는 것이 연기라고 말했습니다. 1961년 KBS 1기 공채 탤런트가 아니라 그보다 더 귀한 KBS 드라마국 개국 멤버라고 정정해달라고 따님 오지혜 씨가 직접 밝혔습니다. 대한민국 연예인들 중 최고 참 그 당시는 처음으로 TV 드라마를 하던 시대라 피디 조연출 배우 등이 거의 연극에 종사하던 사람들로 채워졌습니다. 그래서 TV 방송국 분위기가 극단 같았다고 해요.
또한 놀랍게도 그때는 녹화 기술이 없어서 드라마를 생방송으로 했다고 하는데 거의 연극하듯이 생방송으로 드라마를 찍었다는 것입니다. 후 차례로 녹화기 편집기가 들어왔다고 하는데요. 세상에 드라마를 생방송으로 하다니 진짜 신기하죠. 오현경 씨는 TBC라는 상업방송에서도 드라마를 하며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내 멋에 산다라는 드라마가 히트를 쳤는데 어눌한 역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후 파란 눈의 며느리에서 서양 여자 남편 역으로 또다시 모자란 역으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배우들에 대한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고자 주도적으로 탤런트의 임금 인상 협상에 나서기도 하면서 운영진의 눈밖에 나서 캐스팅에서 배제되는 등 불이익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동료들은 회사에 찍힌 오현경 씨와 친하면 자기도 불이익을 받을까? 봐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오히려 오현경 씨를 멀리하기도 했다고 해요. 이런 과정에서 큰 상처를 받은 그는 TV 드라마를 안 하겠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하도 더러워서 이렇게 방송을 안 하고 있다가 드디어 그의 인생을 대표하는 드라마를 만나게 됩니다. 극단 후배가 방송국 피디가 되어 오현경 씨에게 출연을 부탁했는데 유명한 그리고 오현경 씨를 대표하는 드라마 티비 손자 병법 1987년부터 1993년까지 6년간 방송된 이 드라마에서 늘상 부장 승진에 실패하는 만년 과장 2장수 역을 맡아 굉장한 허연해 보입니다. 위에서 눌러대고 아래에 선 치고 올라오는 중간 관리식의 애환을 정말 잘 살려져 또한 시대를 사는 소시민들의 설움을 잘 표현했고 많은 직장인들에게 위안을 주고 공감을 준 드라마이기도 했습니다. 대본에는 없지만, 애드리브가 많았다고 하는데요. 연극에서 탄탄한 실력을 쌓은 오현경 씨였기 가능한 애드리브가 아닐까 싶구요.
직원들에게는 큰소리치면서도 상사 앞에서는 어눌하게 쩔쩔매며 꼼짝 못하는 캐릭터이지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직원을 위해 총대를 매는 인간적인 모습에 더욱 인기 폭발 피구진은 청춘 속에 매일을 건다 손자병 내가 평사원 시절에는 토요일 일요일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네 잘하겠습니다. 교수님 그런데 오현경 씨는 인기 탈런트였는데도 광고도 찍지 않은 거로도 유명하죠. 과연 왜 그랬을까요? 씨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티비 드라마에 가게 된 것이지만 스스로를 상품화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바 있습니다. 그런 마음의 일환으로 끝까지 광고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내 멋에 산다 작품 후 제약회사 광고 제안이 들어왔는데 100만 원 제한 당시 집 한 채 가격이 40만 원대 거의 집 두 채 가격에 어마어마한 금액을 제시하며 몇 번 제의가 들어왔고 손자병법 당시에도 제안이 들어왔으나 끝까지 광고 거절 그러나 얼마 안 가 후회하죠. 나중에 송백당이라는 연기 스튜디오를 내서 돈이 없어 연기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무료로 진행했는데요.
수많은 적자로 자비까지 들였으나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3년 만에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광고로 돈을 벌어 연기 스튜디오를 운영할 걸 하고 무척 후회한 것이죠. 또한 당시 형편이 넉넉해서 광고를 받았다. 거절한 것이 아니었어요. 광고 거절 후 몇 년 있다가 결혼식을 했는데 돈이 없어서 친구 집 이 층에 전세를 살기도 하고 돈이 없어서 아내이자 배우인 윤소정 씨가 소정 옷집이라는 양장점을 꽤 오래 하기도 했습니다.
오현경 씨가 TBC에서 활동하던 당시 윤소정 씨를 만났는데 홍기가 꽉 찬 오현경 씨가 결혼을 서두르면서 윤소정 씨에게 청혼을 했으나, 그녀는 그의 첫 프로포즈를 거절했습니다. 윤소정 씨는 언니도 결혼을 안 하고 원래 무용을 했지만, 이제 배우로 나온 신인으로서 꿈을 펼치고 싶어서 당시 청혼을 거절했던 것이죠. 그런데 오현경 씨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래를 계기로 개인적으로 찾아왔던 윤소정 씨와 다시 인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68년 결혼 윤소정 씨가 오현경 씨보다 8살이나 어렸습니다. 윤소정 씨가 말한 바에 따라서 극에서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오현경 씨는 깐깐하고 잔소리가 많은 편이라고 해요. 연극과 의상샵을 병행하지 마라는 연극이 너무나 진심인 오현경 씨의 참견으로 인해 잘되던 의상샵도 접었습니다. 윤소정 씨는 1997년 영화 올가미에서 광기 어린 시어머니 역할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데요.
작품 단 한 편으로도 그녀의 연기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 가능할 정도였어요. 영화와 티비 드라마도 했지만, 주로 연극을 했는데요. 이유에 대해서 아주 소식하게 고백했습니다. 연극을 고집한 이유는 티비는 저를 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너무 못생기고 목소리도 안 좋고 카메라가 날 잡으면 튀어요. 너무 내가 싫어서 티비를 안 했어요. 연극계의 데모로 추앙받던 윤소정 씨는 평소 지병이 없었으나 향년 73세인 2017년 패혈증으로 갑작스럽게 별세했습니다.
특히 원로 배우인 남편의 암투병을 도우며 힘들게 지내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연계 활동까지 병행하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해 주변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암 투병을 도우며 고생했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오현경 씨는 훗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자상하지 못해 사랑한다는 말도 잘 못했다.
아내에게 잔소리하며 스트레스를 준 것 같아 미안하다 1남1녀를 두었는데 딸인 오지에도 배우로 활동하고 있어서 명시상부한 배우 가족 1994년 식도암 수술 2007년 위험 수술로 위의 절반 이상을 잘라내고 이후 목디스크 수술 심지어는 세개까지 잘라내는 수술을 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무려 7번의 수술과 설상갈상 교통사고까지 당하는 등 시련이 끊이지 않으며 생사를 넘나들었어요.
그러나 이런 대수술보다 더 힘든 것이 온몸에 피가 빠져 혀를 내고 까무라치는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가기가 무려 두 번 그러나 그런 힘든 상황에서도 수술 직후 2008년에도 무대에 오른 오현경 씨 계단에도 못 오를 지경이었으나 연극계를 도와주기 위해 연극에 출연 그가 얼마나 연극을 목숨처럼 사랑했는지 아시겠죠. 이렇게 죽음을 불사하고 올랐던 무대였는데요.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변에서 건강도 안 좋은데 집에서 쉬지 그렇냐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이것마저 안 하면 죽은 인생이지 살아서 뭐해요. 저한테 연극은 인생 자체거든요. 이렇게 여러 가지 일로 생사를 넘나들면서도 연극을 지켰지만 사랑하는 무대에 다시는 오르지 못할 건강상의 문제가 터지고 맙니다.
바로 작년 8월 뇌출혈로 쓰러지게 되었어요. 작년 5월까지만 해도 연극 무대에 서는 등 그는 뇌출혈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연극 무대에 섰던 것입니다. 뇌출혈로 쓰러진 후 요양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해오다 3월 일 오전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정말 대한민국 연극계 큰 별이 지고 말아 너무나 가슴이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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