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제가 인도네시아를 응원하게 될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신태용 감독이 부임하기 전까지 한국 국민들이 가진 인희에 대한 이미지는 솔직히 무관심 혹은 발리라는 휴양지 그리고 KF20일 논란으로 인한 비호감 아무튼 긍정적인 호감을 갖기에는 특별히 인상적인 게 없는 국가였지만 신태용 감독의 등장으로 인해 어느 때보다 높은 관심을 갖게 되었죠. 그리고 이미 국민들 또한 많은 한국인들이 응원해주는 모습에 어느 때보다 한국에 대해 가장 높은 관심과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양국 간의 오작교 역할을 하며 국내 팬들의 큰 주목을 받는 신감독이지만 사실 2002 멤버들처럼 화려한 국가대표 경력이 없었기에 케이리그의 팬들이 아니고서야 그의 선수 시절을 잘 기억하지는 못할 겁니다. 축구에 관심이 있다면 신태용이라는 이름은 분명 인상적인 이름이긴 한데 뭔가 홍명보처럼 대표팀에서의 활약은 신기하게 기억이 별로 없다는 사실 이것은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사실이자 신태용이 가진 천추의 한이기도 하죠. 간략하게 말하자면, 신태용은 월드컵에 한 번도 못 나가 케이리그의 전설입니다.
최순호와 홍명부 이동국과 더불어 네 명뿐인 케이리그 명예의 전당에 선정될 만큼 케이리그 역사상 최고의 팀을 만들었던 넘버원 미드필더로 꼽힌 그였지만 앞서 말한 명예의 전당 선수들 중에서 유일하게 월드컵에 못 나갔던 선수였었죠.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케이리그 시절에 신태용이만 들어낸 엄청난 기록과 반대로 대표팀에선 찬밥 취급을 받은 이유에 대한 직접적인 그의 고백을 들으신다면 아마도 신태용 본인만큼이나 깊은 안타까움을 느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신태용이 홍명보에 가졌던 엄청난 슬픔과 더불어 유고슬라비아 영웅의 인생을 바꿔놨던 그의 불같은 손찌검에 대해 말해보고자 신태용 그는 1969년생으로서 베개로 유명한 영덕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역 시절 그의 포지션은 미드필더였고 주로 중앙의 공격적인 위치에서 활약했는데 케이리그에 남긴 그의 발자취는 범상치 않음을 넘어 신기록 제족이었죠.
1992년도에 일화 천마에 입단하자마자 신인상을 받았던 그는 이듬해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되는 기록이던 케이리그 3년 연속 우승이란 엄청난 위협을 달성한 혜성이었습니다. 축구선수라면 모두가 꿈꿀만한 엘리트 중에 엘리트 코스였다고 할 수 있죠. 당시 일화의 감독은 소문난 맹장인 박정환 감독이었고 고정훈과 이상윤 박남열등 호화 멤버를 자랑했지만, 팀의 중추적인 리더로 활약한 건 이제가 친입으로 들어온 신태용이었습니다. 특히 박람열과의 황금품비는 지금도 골수팬들 사이에서 찬양을 받고 있죠. 1995년에도 20 득점 20도움을 기록해 리그 MVP를 차지하며 활약을 이어갔고 같은 해 아시아 챔피언신마저 제패하며 케이리그의 시카고 불스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다음 해인 1996년에 소속팀 천마일화가 천안시로 연고지를 이전했는데 이때 상보아의 불화로 신태용과 함께 팀을 전설로 만든 박종환 감독이 해임돼서 당시 수석 코치였던 2장수가 투입됐지만 3년 연속 우승이 무색하게 꼴찌로 떨어지는 등 팀 자체로는 엄청난 암흑기를 겪었음에도 신태용의 활약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시즌 초 아시아 슈퍼컵에서 한 골 한도음으로 대회 MVP를 수상한 것도 모자라 공격수가 아닌 미드필더임에도 케이리그의 득점왕까지 차지해버렸죠 이처럼 이 년 연속 MVP란 전무의무한 기록을 이어가던 그래 신인 시즌이던 1992년부터 5년 연속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는 등 모든 팀들이 탐내하는 케이리그의 대표 스타로 활약했고요. 참고로 케이리그 MVP를 이 회 이상 수상한 선수는 신태용과 이동국뿐이며 신인상과 득점왕 그리고 MVP를 모두 수상한 건 이동국과 정조국 그리고 신태용이란 단 세 사람만이 보유 했던 기록입니다. 지금까지의 이런 기록만 봐도 신태용이 대체 왜 월드컵에 못 나갔는지 이 영상을 보시는 여러분들도 쉽게 이해가 잘 안 가시겠죠.
지금까지 소개해드린 기록은 1992년부터 시작된 5년간의 기록이니 1998년도부터는 뭔가에 부진을 겪었었나라는 추론도 하실 수 있겠지만, 그런 추론이 무색하게 1998년에는 개인 통상 30 득점 30도움을 기록했고 심지어 이때는 분데스리가 러브콜까지 받다가 막바지에 무산될 정도였죠 자 그렇다면 1998년 월드컵에 못 나갔던 미스테리 그는 2000년대에는 활약하지 못한 청년이라는 이름 석 자는 기억이 안 나시죠. 그는 2000년대에는 활약하지 못한 청년 1990년대 후반의 반짝 스타였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의 활약은 2000년대에도 대단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1998년도에 활약에 이어 1999년도엔 첫 FA 커브승을 차지한 2000년도에 들어선 개인 통산 40 득점 40도움을 기록했죠. 또한 연고지를 천안으로 옮기며 암흑기를 겪었던 천마이라는 다시 연고지를 성남으로 옮긴 뒤부터 여전히 상위권으로 계속 도약했고요.
2000년도에 40 득점 40도움에 이어 2001년도엔 50 득점 50도움을 기록했는데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신태용은 또 한 번의 신화로 거듭나게 되죠. 성남일화는 2001년부터 케이리그 3년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또 달성하며 1993년부터 1995년도에 이룩했던 3년 연속 우승을 다시 만들어냈습니다. 이 두 번의 3년 연속 우승의 중심엔 바로 신태용이란 전설이 존재했죠. 그리고 2003년도엔 케이리그 최초의 60 득점 60 돔을 기록했고요. 이 66십 클럽이 상징적인 기록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케이리그의 역사상 단 5명밖에 기록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미드필더들은 골기록에 발목이 잡히고 공격수들은 어시스트에서 발목이 잡히니 항상 넘지 못할 마의 기록이라고 불렸던 걸 신태용이 최초로 해냈던 것입니다. 특히나 2003시즌에는 케이리그 팬들의 기억에 남을 두 개의 명장면을 탄생시켰는데 하나는 수원 팬들이 코너킥을 차러 가던 신태용을 향해 물병을 던지자 화를 내기는커녕 원샤스라고 따봉을 선사해 준 일화였고 또 하나는 부상당한 키퍼를 대신해 골키퍼로 활약하며 승리를 만든 것이었죠.
이렇듯 그는 성남일화에서만 뛰며 각종 대기록과 명장면을 만든 충신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프로 경력에 말미는 북대에서의 찬밥 대우만큼 처참했습니다. 신태용은 3년 연속 우승을 이룬 뒤 이듬해인 2004년에 FA 자격을 얻었으나 결국 성남과 재계약하지 못하며 최종적으로 케이 리그를 떠나게 되었는데 13년간 몸 담은 성남일화에서 변별한 은퇴식조차 갖지 못했던 슬픔이 있죠. 더욱이 1983년부터 시작된 케이리그의 역사이래 신태용은 항구단 소속으로 가장 많은 경기에 출전했던 인물이니 이건 400 경기 이상을 뛰었던 레전드에겐 너무 너무나 가혹했던 이별 방식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많은 이라 팬들은 은퇴 반대 시위를 하며 격분할 정도였죠 또한 미드필더로서 최초로 통산 100호 골의 단 한 골이 모자른 상태였으니 신태용 개인의 측면에서 봐도 월드컵에 가진 한 만큼이나 슬펐을 겁니다. 당시에 얼마나 그가 절박했냐면 거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는 수준이었는데. 30대 중반이던 신태용이 말하기 저는 정말 뛰고 싶습니다. 성남의 유니폼을 입고 뛸 수 있다면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습니다.
전반기에만 뛰어도 되고 플레인 코치로도 만족하겠습니다. 혹시나 연봉이 문제가 된다면 전적으로 구단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라면 거의 빌다시피 매달린 이 인터뷰는 많은 이러팬들을 울렸었죠. 사실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면, 그의 기록 갱신과 도전은 끝나지 않았겠지만, 이렇게 굴곡진 그의 프로 시절을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너무나 화려했기에 너무나 비운 그랬다는 말이 적절할 것 같은데, 한국 국가대표에서의 경력은 단 한 번의 화려함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는 청소년과 올림픽 대표팀을 거친 전형적인 엘리트 국대 선수였지만 앞서 말했듯 케이리그의 전설이었음에도 단 한 번의 월드컵에 못 나갔던 선수였죠 국대로서 참가했던 메이저 대회는 1996년 아시안컵이 유일했는데 그 당시 이란 쇼크라고 불리던 6대 이의 대참패를 하게 된 이후 메이저 대회에서 신태용이란 이름이 대표팀 명단에 포함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1998년 월드컵의 차범근호와 2002년에 히딩크호 당시에도 그는 여전히 최고의 케이리그 선수였지만 대표팀은 끝까지 신태용을 외면하였죠 그리고 이미 스테리한 발탁 제외에는 바로 홍명보란 배경이 존재했습니다. 신태용은 1992년에 신인상을 받고 1993년부터 3회 연속 우승을 시작했으니 시기상으로 보면 1994년부터 발탁되어 2002월드컵까지는 충분히 노려볼 만했죠. 하지만 또한 한 명의 전설이자 한국 축구의 상징이던 홍명보가 당시엔 플레이 메이커 역할을 맡았기에 같은 역할이던 신태용의 자리는 없었죠. 더욱이 이상하게 대표팀에만 가면 뭔가 소극적이고 위축된 모습을 보였는데 케이리그 은퇴 후 12년 만에 신태용은 다음 같은 속마음을 토로했습니다. 아직도 항상 후회하고 또 후회합니다. 케이리그에서 했던 만큼 왜 못했을까? 말이죠. 성남에선 내가 원하는 대로 경기했지만, 대표팀에선 항상 막내 같던 심정이었습니다.
선배들이랑 다투기도 하고 욕심도 내면서 내 위치를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렇기엔 홍명고 선배의 존재는 너무나 위압적이고 마치 큰 산만 같았죠 그래서 케이리그에서와 다르게 항상 주눅 들고 지원에 그치는 역할만 했었습니다. 이와 같은 신태용의 인터뷰만 보자면 평소에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지만 완전히 정반대에 무서운 성격으로 유명합니다. 우승천사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전설적인 용병이던 유고의 샤샤드라쿠의 아직도 신태용을 떠올리면 허리 쭈뼈 썰 정도로 두려웠다 밝혔는데 어째서 190이 넘는 장신이던 그는 본인보다 한참 작은 신태용을 겁냈던 걸까요?
당시의 샤샤는 실력 좋다고 소문이 났지만 거만하고 끓는 용암 같은 성격 본인을 중심으로 플레이가 되지 않으면 감독과 동료마저 갈구는 걸로 유명했는데 이건 케이리그의 전설인 신태용에겐 절대 용납될 수 없던 성격이었죠. 샤샤는 신태용의 부드러운 충고에도 계속해서 팀의 분위기를 망가뜨리던 중 하루는 신태용에게 불려가 손찌검을 당하고는 그대로 주저앉아 기절했다고 합니다.
타고난 완력을 가진 190 센치에 백인이 174 센치의 동양인을 얕보다가 큰일을 당한 것이죠. 뒤로는 아주 예의 바른 선수가 되어 성남을 떠날 때까지 큰 문제를 안 읽혔으니 샤샤조차도 인생을 뒤바꾼 손찌검이었다며 신태용에게 고마워할 정도입니다. 이처럼 선수 시절에 많은 애환을 가졌던 신태용 감독이 부디 인도네시아에서 올림픽 진출이란 큰 기적을 만들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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