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정훈희 씨는 1951년생으로 부산 출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원래는 서울에 있었는데, 6.25 전쟁이 나자 서울 집을 놔두고 부산 아미동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쭉 살게 되었습니다. 정훈희 씨는 음악가 집안으로 그녀의 표현대로 하면 딴따라 집안이었습니다. 정훈희 씨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유명한 가수 겸 피아니스트 정근수 씨였고 위로 4명의 오빠들이 기타리스트 클라리넷 트럼펫 색소폰 등 다 음악을 했습니다. 노래 어제처럼을 부른 가수 제이가 정훈희 씨 조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딸의 가수가 되길 원했습니다. 정훈희 씨는 초등학생 시절 다른 아이들이 동요를 부를 때 자기는 팝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영어를 한국말로 적어주셨다고 해요. 음악을 하는 아버지와 오빠들 사이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외동딸로 어렸을 때부터 성품이 밝고 명랑하고 목소리 좋고 노래를 잘 부르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주 어린 나이에 가수로 데뷔하게 됩니다. 당대 최고 작곡가 이봉조 씨와의 인연으로 곡 안개를 받아 1967년 만 16세의 나이로 1집을 발표하며 가요계에 입문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고교 1학년인 1967년 방학을 맞은 정훈희 씨는 유명한 서울 그랜드 호텔 나이트클럽에 악단장이었던 작은아버지를 따라와 낮에 작은아버지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나이트클럽 옆에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이봉조 씨는 정훈희 씨의 노래를 듣고 삐리 꽂혀 단숨에 달려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가 누구입니까? 라고 묻자 작은아버지가 우리 형님 딸인데 가수한다는 데 아직 애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봉조 씨가 자기가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 좀 시켜보겠다고 해서 정훈희씨는 다시 노래를 불렀습니다. 정훈희 씨가 외국 팝송을 잘 부르니까 이봉조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쪼매난 가시나가 건방지게 노래 잘하네 당시 이봉조씨는 안개라는 노래를 만들어 놓고 자신의 색소폰 연주로 취입한 상태였는데 그 노래에 맞는 목소리를 찾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정훈희 이봉조 콤비는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그 후 10여 일 정도 만에 이봉주 씨가 정훈희 씨를 찾아 연습 2번 하고 바로 2번 녹음해서 안개라는 곡이 나왔습니다. 그 사람은 어디야 작곡가 이봉주 씨는 짙은 감성의 소울 음악을 추구하던 분이었고 정훈희 씨는 그렇게 소울의 전설이 됩니다. 그 당시 트로트 음악이 대세였는데 정훈희 씨는 정통 팝이자 재즈풍으로 아주 새롭고 참신한 가수였습니다. 그 후 이봉주 씨와 1970년 제1회 도쿄국제가요제에 나가 가수상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아바도 출전했는데 아바는 상을 못 받고 돌아갔다고 해요.
정훈희 씨는 월드베스트 텐에 들어가면서 국내 최초로 국제가요제에 출전 입상까지 한 것입니다. 이듬해 아테네 국제가요제에서는 곡 너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수상 1975년 칠레 가요제에서는 곡 무인도로 3위 상과 최고가 수상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실내에는 교포가 전혀 없었는데 마침 그곳에 있던 원양어선 선원들이 배에 달던 대형 태극기를 가지고 와서 방청석에서 응원했습니다. 머나먼 타국에서 휘날리는 대형 태극기를 보고 없던 힘이 불끈 치솟아 날듯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이렇게 잘 나가다가 청천벽력 같은 일을 겪게 됩니다. 1975년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방송 출연 정지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못 잘 정도로 괴로워했습니다. 그렇게 6년 정도 노래를 못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작곡가 이봉주 씨가 정훈희 씨를 불러 내가 가장 깨끗한 마음으로 만든 곡이라고 하면서 곡 하나를 피아노로 쳐 주었습니다. 그게 그 유명한 꽃밭에서였습니다. 정훈희 씨가 곡이 너무 예쁘다고 하니까 이봉주 씨가 니 노래다 라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정훈희 씨가 방송 추정 금지가 풀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고 해요. 많은 가수들이 그 곡을 탐냈으나 오로지 정훈희 씨에게 주기 위해 기다려주었다고 합니다. 1979년 칠레 가요제에 다시 출전한 정운이 이봉주 콤비는 꽃밭에서를 스페인어로 번역해 불러서 최우수 가수상을 수상합니다. 이는 한국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당국에서는 국위를 선양한 대마초 연예인에 대해서는 선처를 베풀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했고 정운희 씨의 칠레 가요제 실황필름은 전국에 방송되었습니다. 이렇게 정훈희 씨는 한국 가수 중 최다 해
외 음악 페스티벌 수상 기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미리 보는 한류 원조 한류라고 할 수 있죠. 결국 1981년 규제가 풀렸고 이후 82년 발표된 꽃밭에서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록 가수 김태화 씨와 결혼합니다. 두사람의 결혼은 그 당시 보수적인 시대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파격적인 결혼으로 세간의 입방에 오르내렸습니다. 두사람은 처음에는 서로의 존재를 잘 모른 상태로 시작합니다. 미군에서 오래 노래를 하던 로커 김태화 씨는 대중 가수들을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던 것입니다. 정훈희 씨 또한 김태화 씨를 잘 몰랐는데요. 김태화 씨는 우리나라 록 밴드 1세대 라스트 찬스라는 그룹의 보컬이었습니다.
그는 모두가 닮고 싶어 하던 대한민국 록 밴드의 전설로 타협하지 않은 정통을 고수한 럭스타였습니다. 팍팍 내지르는 창법의 완벽한 로커이며 강력한 포스가 그 당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앞서 가던 가수이기도 했죠. 또한 독특하면서도 세련된 무대 메달로 강렬한 매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게 방송이 아닌 무대를 누비던 전설의 노커였는데 텔레비전 나가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기도 했습니다. 두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70년 세종문화회관이었는데. 김태화 씨가 그룹에서 노래를 하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날아다녔다고 합니다. 그 모습이 정훈일 씨에게는 흡사 미친놈 같았다고 해요.
꼭 저래야 노래가 나오나 그랬다고 오후 김태화 씨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민 가서 음악을 하다가 잠깐 한국에 나와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김태화씨를 본 10년 뒤 다시 그의 공연을 보게 되었는데 정훈희 씨 친구들이 김태화 씨를 보고 뿅과서 니가 가수니까 김태화 좀 불러오라 라고 성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김태화씨가 공연이 끝나고 잠시 슬로우 음악이 나오자 수많은 여자들 사이에서 정훈희 씨에게 춤을 신청해서 마치 간택받은 듯한 우쭐한 기분을 느꼈다고 해요. 그 후 김태화 씨와 만남에서 호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히 김태화 씨의 남성적인 목소리에 크게 매력을 느꼈다고 해요.
그 당시까지도 정훈희 씨를 잘 모르던 김태화 씨가 어느 날 라디오에 나오는 정훈희 씨 노래를 듣게 되어 꽃밭에서 무인도 이 노래가 니가 부른 노래가 맞냐고 물어봐서 정훈희 씨가 맞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순간 정훈희 씨가 보석이라는 것을 캐치하고 김태화 씨 표현 표현대로 하면 집중 공략했다고 합니다. 두사람은 그렇게 연인에서 음악적 동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녹음악은 돈이 안돼서 정훈희씨가 김도향씨에게 곡을 부탁했는데 그 노래가 그 유명한 난참 바보처럼 살았군요입니다. 1980년 그 곡으로 김태화씨는 국제 가요제에 나가게 됩니다. 김태화 씨는 무대나 삶이 모두 남달랐고 평범하지 않았으며 특이했죠. 두사람 모두 유명한 가수라 서로 만날 장소를 찾다가 여의치 않아 방을 하나 얻었는데 그렇게 동거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가지게 되자 혼인신고를 하고 동거 7년만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서로 다른 두 분야의 빅스타 락의 김태화 팝의 정훈희 이렇게 스타 커플이 탄생한 것이었죠. 김태화 씨와 정훈희 씨는 자녀를 임신하고 있을 당시 노래 우리는 하나를 발표해서 큰 사랑을 받기도 했습니다. 슬하에 아들 둘이 있죠. 그러나 그 당시에는 혼전동거에 대해서는 인식이 좋지 않았던 때라 두 사람의 이미지가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혼 이후에도 쇼윈더 부부라는 의혹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김태화 씨는 결혼 후에도 약에 취해 9시 뉴스에 2번이나 나오고 학교에도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심지어 바람도 많이 피웠다고 합니다. 과거 정훈희 씨 아버지가 바람기가 심해 어머니가 고생했는데 본인도 그런 고통을 겪게 된 것이었습니다. 정훈희 씨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만나는 날마다 아줌마가 달랐고 아버지가 내연녀에게 엄마라고 부르라고 할 정도였다고 해요.
정훈희 씨와 절친한 현미 씨는 정훈희 남편이 바람을 많이 피웠다면서 정훈희의 남편은 가만히 있어도 여자가 줄줄 따랐다고 폭로했습니다. 그 당시 정훈희 씨는 의부증에 우울증까지 걸리며 힘들어 했습니다. 2017년경 김태화 씨는 위궤양 치료 중 암을 발견해서 위 전체를 다 절제합니다. 또 한번 암이 재발해서 두 번째 수술을 했는데 더 이상 노래하고 싶어요. 쉽지 않을 정도로 크게 고생했던 겁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그동안 정훈희 씨한테 잘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했죠. 이런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두사람은 지금까지 이혼하지 않고 해로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두 사람은 50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별거 중입니다. 정훈희 씨가 갱년기에 접어들어 같이 살기가 싫어져 이혼까지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혼하려면 자식 문제나 재산문제 등에 걸려서 이혼한 것처럼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별거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각방살이로 시작해 결국 집까지 따로 쓰게 된 것이죠.
새집 살림까지 한 적이 있는데요. 2012년 90세 된 어머니와 정훈희 씨가 서울에서 같이 살고 있었고, 부산에 있는 집을 관리하기 위해 부산에서 김태화 씨가 살았습니다. 부산에는 집과 별채까지 2채가 더 있어 이렇게 새집살림까지 해봤다고 합니다. 현재는 부산에서 각자 다른 집에 따로 살고 있는데, 이러다가 남편이 바람이라도 나면 어떡할 거냐고 묻자 정훈희 씨는 쿨하게 젊었을 때도 봐줬는데 지금이라도 못봐주겠냐고 하며 웃었습니다. 두 사람은 비록 별거를 하고 있지만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로 함께 자기들의 공간인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고 공연을 하며 서로 도우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현재 김태화 씨와 정훈희 씨 부부는 부산 임랑해수욕장 주변에 위치한 라이브카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삶에서 실수를 할 수 있는 이렇게 용서를 해주면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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