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 씨는 어린 시절 두 번이나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홍역 접종을 하지도 않은 세 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렸어요. 당시는 홍역으로 아이들이 많이 죽기도 했는데요. 어린 시절 아무도 그를 제대로 돌봐주지 않아 접종을 하지 못한 그는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스스로 홍역 주사를 맞았다고 합니다. 사실 어머니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고부간의 갈등으로 할머니가 너무 힘들게 하셨고 아버지 또한 술만 먹으면 폭력을 휘두른 것이었어요. 어머니가 가출을 하자 아버지마저 어머니를 찾겠다고 나가 버렸습니다. 결국 친할머니가 어린아이를 키우게 되었지만 네 살 때 할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시더니, 병석에 눕게 되었고 할머니는 2~3년 뒤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그 후 진성 씨는 그 어린 나이에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진성 씨는 1960년생인데요. 1960년대는 대부분의 국민이 가난한 시절로 자기 식구 건사하기도 힘든 때인데 남의 식구인 어린 진성은 더욱 굶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에 겨우 고구마 하나 먹을 때가 부지기수였다고 해요. 부모님이 없는 것도 서러운데 배고픈 설움마저 견뎌야 했던 어린 진성에게 가장 큰 위안은 노래였습니다. 그때는 라디오 시절이었는데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애달픈 노래의 가사가 자기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아 더욱 노래에 빠져들었어요. 더구나 진성 씨는 노래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습니다. 라디오에서 노래를 들으면 바로 다음 날 따라 부를 정도였어요.
또한 어깨너머로 창을 하는 것을 보고 배운 적도 있는데, 지금도 그가 창을 하는 것을 보면 수준급입니다. 배가 고파 산으로 들로 다니며 진달래 등을 따 먹으며 허기를 달랬고 외로운 마음에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녔어요. 그때 부른 노래가 이미자 씨의 ‘동백 아가씨’, ‘기러기 아빠’ 등 어린아이의 구슬픈 노래를 듣고 논밭에서 일하는 어르신들은 “어린아이가 무슨 한이 많아 노래를 저렇게 서럽게 부르냐”며 짠해 했습니다. 그래서 밥이며 동전 등을 주기도 했어요. 그러자 그는 밥을 얻어먹기 위해 논두렁 밭두렁 등지로 배회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릿고개’라는 노래 가사를 만들기도 했죠. 의지할 곳 없는 그에게 노래만이 유일한 위로이자 삶의 희망이었는데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가수가 된 것이 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갈 나이가 되었지만 부모님이 안 계셔 호적마저 없어 초등학교 입학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살고 있었어요. 열 살쯤에 주위에서 하는 말을 듣고 “부모님이 자기를 버리고 갈 거면 차라리 고아원에 버렸으면 고아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무상으로 학교도 보내주고 또 먹여주었을 텐데” 하며 원망하기도 했다고 해요. 그렇게 고아보다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헤어진 지 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열한 살이 되던 해에 다시 어머니를 만나 가족이 함께 살게 되었어요. 진성 씨는 열두 살에 비로소 학교에 처음으로 들어가게 되죠. 나이 때문에 바로 4학년이 되었어요.
그런데 다시 합친 부모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심하게 싸웠고 결국 외삼촌이 어머니를 데리러 왔습니다. 어머니 없이 너무나 굶주렸던 어린아이는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며 외삼촌과 어머니를 쫓아 버스정류장까지 따라왔어요. 버스를 타는 어머니를 따라 자기도 버스에 올라타려는 순간 외삼촌이 군홧발로 어린아이의 가슴팍을 찼고 당시 진흙투성이였던 버스정류장 바닥에 떨어진 어린 진성의 가슴속에는 그만 한이 맺히고 말았습니다. 부모님이 원수같이 느껴지고 다시는 그들을 찾지 않으리라 다짐했어요. 다시 만난 어머니와 1년 정도 같이 살다가 또다시 어머니에게 버림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죠. 그렇게 열두 살의 어린 진성은 또다시 고아보다 못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유랑극단을 따라 떠돌아다녔기 때문이죠.
그 후 다니는 중학교에 유일하게 홀로 가지 못하고 교복 입은 친구들이 부러워 숨어다니며 배회하다가 우연히 6학년 담임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는데요. 그에게 서울에 올라가 기술을 배우라며 얼마간의 차비와 숙식비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열네 살에 홀로 서울로 상경했어요. 그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중국집 배달 일부터 시작해 닥치는 대로 일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가수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아 열다섯 살, 열여섯 살에 유랑극단에서 일하기도 하고 열일곱 살, 열여덟 살에 야간업소에서 가수 일을 시작합니다.
물론 노래만 부른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허드렛일 등 잡일도 함께하는 땜빵 가수였죠. 다시는 부모님을 찾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저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기가 유명한 가수가 되면 부모님이 자기를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고 해요. 그 당시 자신의 신세가 마치 돈이지만 값어치 없는 동전 같다고 느꼈는데 이 또한 훗날 그가 지은 가사의 노래로 탄생하죠. 후에 20대가 되어서는 밤무대와 노가다를 하면서 술로 외로움을 채우는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20대 야간 업소를 전전하면서 새벽 1시에 일이 끝나면 마음이 공허한 거예요. 집에 가 봐야 반겨 줄 사람도 없잖아요.
밖에서 빙빙 돌다가 친구에게 전화해서 시장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삼삼오오 모이면 동틀 때까지 마시고 그대로 집에 가서 쓰러져 자고, 야간 업소에서 노래하면서도 낮에는 건축 사무소를 다녔어요. 노가다 아침에 별 보고 나가서 별 보고 들어오면서 그렇게 열심히 살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야간 업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한 작사가가 다가와 메들리 가수를 제안해서 25살 때 처음으로 메들리 음반을 출시했습니다. 거의 20년간 메들리 가수로 활동하며 100집 이상을 만들었고 메들리 업계에서는 인정받는 가수가 되었지만 아직도 그는 대중에게는 무명가수였어요.
남의 곡을 부르는 메들리 가수에서 자신의 곡을 부르고 싶었던 그는 ‘님의 등불’, ‘내가 바보야’ 등을 냈지만 당시에는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나중에 역주행해서 뜨죠. ‘동쪽에서 부는 바람’처럼 그렇게 열심히 살았지만 30대에도 여전히 밤무대를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밤무대에서 유혹도 적지 않았어요. 1990년대 초반에 업소에서 노래하면 아줌마들이 그걸 보고 인터폰으로 불렀어요. 나는 잘 안 갔어요. 술을 팔아야 하니 웨이터들이 우리를 이용해 먹었어요. ‘인사 한 번만 드리면, 양주 15만 원짜리 하나 들어가니까 좀 도와달라’고 같은 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먹고살겠다는데 모른 척할 수도 없잖아요.
들어가면 아줌마들이 만 원짜리 다섯 장을 팁으로 줬어요. 절대 안 받았지. 그 팁을 받으면 마음이 무너져 버리거든요. 지금 화폐 가치로는 적지 않은 돈이지만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고 그렇게 살면 자기가 삼류가 될 것 같아 도저히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주변에는 잘 사는 사모님 하나 잡아서 팔자 고치는 노래하는 제비족도 꽤 있었다고 해요. 그러다 그의 인생에 서서히 서광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바로 ‘태클을 걸지 마’인데요. 그는 이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했어요. 아버지 무덤에 갔다가 이 노래를 짓게 되었습니다. 막걸리 한 잔 올리고 자기도 술 한 잔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버지 환청이 들렸어요.
‘너는 그 계통에서 그렇게 오래된 녀석이 왜 아직도 헤매고 있냐? 누가 너에게 태클을 거는 사람이 있으면 아비가 다 막아줄 테니 마음껏 한번 날아봐라.’ 그 말을 듣고 불과 5분 만에 가사와 멜로디가 동시에 나왔다고 합니다. ‘태클을 걸지 마’는 사실은 자기의 비참한 삶에 대한 절규였다고 해요. ‘어떻게 살았냐고 묻지를 마. / 절 없는 세월 탓에 / 선물해 인생에 / 태클을 걸지 마.’ 그러나 아직도 전국적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아니었어요. 그 후 2012년 ‘안동역에서’라는 노래가 뜨면서 대한민국 곳곳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년 반 정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지죠. 젊은 시절에 술로 외로움을 달래는 나날을 보내서 그런지 그는 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병 두 개가 한꺼번에 옵니다. 암뿐만 아니라 심장판막증까지. 사실 심장판막증만 해도 대단히 위험한 병인데 림프종 혈액암까지 걸린 것이었어요. 10대에 가수 생활을 시작해 40년 만에 무명을 벗고 이제 겨우 성공 가도를 달리려는 순간 너무나 가혹한 시련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때가 2016년 12월 29일로 2017년이 다 된 때였습니다. 알고 보니 심장판막증이면 노래 부르는 것도 버겁다고 해요. 심장판막증 진단받고 1~2달 더 노래하겠다고 버텼으면 이미 죽었을 거예요.
노래 부르고 나면 가슴이 당긴 적도 많았거든요. 길거리에 그냥 주저앉아서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음 스케줄 장소로 이동했던 적도 많아요. 이제 막 뜨기 시작해서 또다시 잊혀질까 봐 두려워 참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무대에서 쓰러지기까지 해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심장이 좋지 않아 암 치료를 바로 할 수가 없었어요. 항암 약물치료를 해야 하는데 심장에 무리가 와 쇼크사할 수가 있어서 한 달간 심장부터 다스린 뒤에 항암치료를 시작했죠. 나중에 수술을 하는데 끔찍한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가수의 생명과도 같은 목 부분에 무려 20센티미터 넘게 절개했어요. 이런 수술은 전신마취를 해야 하는데 심장이 약해서 부분 마취를 하고 수술했는데요.
정신이 말짱한 상태에서 째고 자르고 하는 과정을 다 느끼고 있으려니 그 공포란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골수 채취까지 마취 없이 했는데 정말 고통스러웠다고 해요. 죽음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사실 너무 힘들어 생을 포기할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해요. 그걸 극복하고 항암 6차까지 마쳤습니다. 그렇게 6개월 정도를 병상에 누워있자 근육이 다 빠져 걷지를 못할 정도가 되기도 했어요. 이 사진을 보고 정말 가슴이 아팠는데요.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 알고 보니 진성 씨가 혈액암 투병 중이라는 것은 우연히 알려졌다고 해요. 병원에서 근무하는 미화원 아주머니가 그를 알아보고 입소문 내서 신문 기사가 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퇴원하자마자 바로 방송에 출연했습니다. 2017년 5월 아침마당. 잊혀지는 것이 가장 두려웠던 그는 몸 추스릴 새도 없이 다시 방송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죠. ‘중환자실을 전전할 정도로 3개월 28일인가 지났을 때 KBS 아침마당에서 연락이 왔어요. 걸음도 못 걷는 상태에서 그냥 무조건 오케이 했어요. 왜? 30년 40년간 무명 생활하다가 인제 겨우 여러분께 좀 알려졌는데 잊혀져 가는 게 또 너무 두려운 거야.’ 그렇게 다시 일어난 그는 ‘보릿고개’, ‘가지 마’, ‘동전 인생’, ‘못난 놈’까지 모두 히트시켰는데요. 이 노래들은 모두 진성 씨가 직접 작사했습니다. 가사들이 정말 가슴 절절하게 와닿고 옛 시절을 회상하게 만드는데요. 모두 자신의 인생 경험을 담아 써서 그렇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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