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적인 가창력의 뮤지컬 배우이자 영원한 가요계 디바 윤복희 씨의 불꽃 같은 인생을 만나보시죠. 그런데 그녀의 인생에는 용서하기 힘들었던 남자가 3명이나 있었는데요.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날 동정하진 말아요. 이제는 거짓이 없었어요. 사람을 위해 인색하지 않았어.” 윤복희 씨는 자신에 대한 인터넷 정보가 틀린 게 많다고 하며 고향이 충남 보령이 아니라고 정정했습니다. 충남 보령은 아버지 고향이고 자신은 서울에서 태어났다고. 1946년 서울 한복판 을지로 2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윤복희 씨의 아버지는 원래 성악가였는데요. 서울 음대를 나오고 일본 동경음대에서 공부하고 와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클래식 오페라로 ‘견우직녀’, ‘콩쥐팥쥐’ 같은 공연을 했다고 해요. 아버지 성함은 윤복일 씨로 ‘북일부길쇼’라는 극단도 창단했죠. 그런데 어린 윤복희는 부모가 아닌 극단 단원들 품에서 자라며 말도 제대로 하기 전인 나이부터 노래와 춤을 배웠고 무대가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어머니 또한 예술인이어서 바빴기 때문이죠. 어머니는 어렸을 때 명이 짧다는 얘기를 들어 명을 길게 하기 위해서 예능을 해야 한다는 미신에 천재 무용가 최승희 씨의 제자로 배우였고, 나중에 국악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부모의 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윤복희 씨는 어렸을 때부터 이미 천재였죠. 겨우 5살 때 아버지의 무대에 처음으로 서기 시작했는데, 공식적으로는 1952년 6살 때 뮤지컬 ‘크리스마스 선물’로 데뷔했다고 합니다.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바로 유명해졌다고 해요. 그러나 안타까운 고백을 했습니다. “부모 사랑은 전혀 못 받았어요. 어려서부터 그렇게 살았으니 그게 내 삶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다가 더욱 큰 시련이 닥칩니다. 아버지의 병환으로 어머니는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유랑극단을 따라 집을 떠나게 되었어요. 아버지의 병환은 약물 중독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무대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맙니다.
명을 길게 하기 위해 당시 천대받던 국악까지 했으나, 3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이때 윤복희 씨의 나이는 7살이었어요. 이후에도 아버지는 수용소를 드나들었고 돌볼 사람이 없는 어린 윤복희는 여관과 길거리를 전전하며 배고픔과 외로움에 힘들어했습니다. “아빠는 아프지, 오빠는 학교에 다녀야 되지.” 부모님이 주신 재능으로 그녀는 7살 때부터 소녀 가장으로 무대에서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 당시를 회상하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땐 무대 서는 게 참 싫었죠. 저도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 다니면서 공부하고 싶었어요. 어릴 때부터 ‘이건 아니다’ 하면서 항상 도망갈 곳을 찾았던 것 같아요.” 항상 도망갈 곳을 찾다가 끔찍한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다는 것이었는데요.
어린 소녀는 자기도 죽으면 어머니를 볼 수 있을 거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극단적인 시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년 뒤, 어머니 죽음에 자책하며 괴로워하다가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천애 고아가 된 어린 윤복희는 아홉 살부터 미8군 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먹고 살아야 하고 오빠 학교도 보내야 해서 죽기 살기로 노래를 불렀다고 해요. 15살 무렵부터는 해외 활동을 하며 최초의 한류 아이돌이 되는데요. ‘코리안 키튼즈’라는 이름으로 필리핀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싱가포르를 비롯해 영국 등 유럽과 미국 라스베이거스까지 진출해 주목받으며 4년간 해외 활동을 지속했어요.
그 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했죠. 1967년에 한국에서 작곡가 이봉조 씨의 곡을 취입하면서 공식적인 가수 데뷔가 되는데요. 그 노래가 바로 ‘웃는 얼굴’입니다. 다정해도, 그 후 나온 노래가 ‘외돌아보’, 이런 어마어마한 가수였는데 어느 순간 가수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뮤지컬에 올인하면서 거의 100편에 가까운 뮤지컬 공연을 했는데요.
자신은 가수라기보다는 뮤지컬 배우이며 노래는 뮤지컬 배우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는 것뿐이라는 입장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노래 실력은 ‘천재’라는 말 외에는 설명이 어려울 정도로 대단히 특출나서 우리나라에서 그녀를 능가할 가수가 있을까 싶은데요. 가수로서 활동이 짧았다는 것이 무척 아쉽습니다. 그녀의 개인사에 원인이 있지 않았나 싶은데요. 특히 그녀는 용서하기 힘든 남자가 있었습니다. 1968년 22살이라는 나이에 결혼하는데요. 상대는 14살 때 만난 첫사랑 유주용 씨였습니다. 너무나 외로웠던 그녀는 첫사랑을 일찍 만난 것 같아요. 유주용 씨는 ‘부모’란 노래로 유명한 가수이자 배우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독일 유학 중 독일 여성과 결혼해서 그를 낳았는데, 그는 경기고, 서울대를 졸업하고 연세대 대학원까지 나온 수재였습니다. 또한 그는 아주 매력적인 보이스를 가진 사람이었죠. 그런데 결혼 후 유주용 씨는 자신의 커리어를 접고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그녀의 로드 매니저를 하며 뒷받침합니다. 심지어는 집에서 요리도 하고 빨래를 하고 옷을 개는 것까지 모두 그가 도맡아 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윤복희 씨가 진심으로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무릎팍도사’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어요.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쭉 소녀가장으로 일을 해와서 결혼해서는 평범한 주부가 되어 살기를 원했고, 무대도 지겨웠고 공연을 위해 맨날 짐을 싸는 것도 그만하고 싶었다고 해요.
그러나 자신감을 잃은 남편을 대신해 자기가 일을 해야 했다고, 결혼하기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결혼하기 전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거기에 대한 실망감도 있었다고 털어놓았어요. 또한 당시 그녀를 짝사랑하는 안무가가 있었는데요. 유주용 씨가 그녀를 의심하자 화김에 안무가를 사랑한다고 질러버렸고 그때 크게 상처를 입은 유주용 씨는 몇 날 며칠 술을 마시며 두문불출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는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하죠.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요. 그 사이에 윤복희 씨는 임신도 여러 차례 했는데 계속 아이를 지우고 맙니다. 당시 계약 조건에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고 피임 방법을 몰라 계속 그 힘든 수술을 하고 말았어요. 그렇게 그녀의 표현대로 하자면 4년 동안 의미 없는 결혼 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러다 1975년 한국 공연 후 1976년 또 다시 스캔들이 터집니다. 이번에는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톱가수 남진 씨가 윤복희 씨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이 신문에 나버렸습니다. 이 기사를 보고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하는 유재용 씨와 크게 싸우다가 윤복희 씨는 나도 그 사람이 좋다고 말해버리며 유재용 씨와 헤어지게 되었고 그 후 그녀는 진짜 남진 씨와 결혼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길게 가지 못하고 3년 정도 살다가 헤어지죠. 이렇게 남진 씨와 헤어지고 나온 노래가 바로 ‘여러분’이라는 노래입니다. 먼저 자신이 이 노래로 크게 위로를 받았고 자기처럼 다른 사람들도 이 노래로 위로를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노래를 부른다고 하죠.
그런데 그녀를 정작 가장 괴롭혔던 사람은 남진 씨가 아니라 다른 세 명의 남자들이었으며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이 남자들을 용서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윤복희 씨는 2011년 여성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털어놓은 바 있습니다. “아버지와 오빠… 그녀에게 남자란 실망만 안겨주는 존재였고 하기 싫은 일을 계속하게 했던 남편도 결국은 다르지 않았다”라고 말하면서 경악할 만한 진실을 말했습니다. “학교에 가려고 서류를 떼 보다가 알게 됐어요. 출생신고가 안 되어 있었던 거예요. 그때 부모님에게 엄청난 실망감을 느꼈어요. 아버지는 아내가 따로 있었고, 어머니는 호적에 시집도 안 간 처녀로 되어있었어요. 아버지가 약에 손을 대지 않았으면 어머니가 돈 벌러 떠나서 죽지 않았을 텐데 하는 원망도 있었어요. 아버지란 존재가 제게 좋을 리 없었죠.”
오빠 유주용 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해외로 떠나기 전 윤복희 씨는 미8군에서 활동하며 14살의 나이로 집을 샀어요. 명의는 오빠 이름으로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귀국해보니 집은 이미 팔린 뒤였어요. 윤복희 씨는 다음에 공연을 계약하고 미리 돈을 받아 다시 오빠에게 집을 사줬습니다. 게다가 오빠는 가수 활동을 하며 동생에게 종종 의지했는데요. 자기 노래가 뜨지 않으면 그녀를 ‘코러스’로 불러 무대에 세워 자기 노래를 함께 부르게 했죠. “아버지 다음으로, 실망을 준 사람이 오빠였어요. 왜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런가 하는 회의가 들었죠.” 그런 고통이 암이 되었는지 그녀는 후두암과 자궁암에 걸려 생사를 오가기도 했습니다. 윤복희 씨는 간증 자서전 ‘저예요, 주님’을 집필하며 이런 말을 하기도 했죠. “쓰면서 많이 힘들었어요.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도 많았으니까요?”
“2번은 이렇게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집필을 마치고 민감한 부분을 빼는 작업만 7개월이 걸린 것 같아요. 당시 이랬겠다고 추측할 수 있는 장면이나 개인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시간은 삭제했어요. 5%만 남겨뒀죠. 나머지 95%는 저만 기억하고 있으려고요.” 자서전에 이렇게 쓸 정도면 방송에서도 그녀가 털어놓은 것은 5%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이런 여러 가지 삶의 고통에 시달리던 그녀는 어떻게 여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까요? 윤복희 씨는 뒤늦게 종교를 가지게 되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달라졌습니다. 그동안 지긋지긋했던 무대가 소중하게 다가왔고 자신의 재능과 인생에서 가졌던 기회에 감사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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