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가수 우승을 기념하며 박창근 씨가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진행했는데요, 이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두 가지에 대해 직접 입을 열어 밝혔습니다. 하나는 가장 중요한 결승전에서 왜 아무도 모르는 자작곡을 선택해서 불렀는지, 그리고 정치색 논란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흔히 인터뷰에서 밝히듯이, 국민가수에 출연한 계기는 77세 된 노모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고, 본인 스스로도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박창근 씨가 음악하는 것을 결사반대했고, 그런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많이 쫓겨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욕을 많이 했다고 방송에서 밝히기도 했죠. 욕도 언어폭력인데, 아버지의 반대와 23년 무명 생활 동안, 놀랍게도 어머니는 끝없이 자신을 믿고 지지해 줬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한 어머니시네요. 요즘은 자식도 능력 있고 돈 잘 벌어야 사랑받는데, 내 자식이 23년 동안 무명 가수로 초라하게 길거리에서 노래한다면, 그래도 내가 자식을 믿고 끝까지 응원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조건 없는 희생과 사랑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박창근 씨가 최종 결승전에서 선택한 인생곡은 ‘엄마’라는 곡이었는데, 문제는 이 곡이 자작곡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자작곡이라는 말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승패가 달려 있는 결승전에서 자작곡을 선택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마스터들과 경연 참가자들, 그리고 방송을 시청하는 시청자들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심지어 ‘떨어지고 싶은 모양’이라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대중에게 공감을 얻고 감동을 주려면, 익숙한 곡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우승하려면 무려 60%를 차지하는 실시간 문자 투표를 많이 받아야 하는데, 널리 알려진 곡도 아니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자작곡이었고, 그가 유명한 작곡가인 것도 아니잖아요. 정말 기가 막힌 결승전 파이널 인생곡 선택이었습니다. 이 자작곡은 2015년 발표한 4집 정규 음반 바람의 기억에 들어 있는 노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결승전에서 자작곡을 선택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는 직접 입을 열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최종전에서 대중이 바라는 건 어쩌면 더 격정적이고 더 폭발적인 모습이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자존심을 지키며 그동안 해왔던 음악, 그리고 그 선택을 도와준 엄마와 많은 분께 죄송하고도 고마운 마음이 컸습니다.” 결국 자작곡을 선택한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주제로 한 노래는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작곡을 불렀다는 것은 세상과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23년 동안 무명 가수로서 걸어온 자신과, 어머니로 상징되는 자기 존중과 자존심의 표현입니다.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돈보다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들은 넓은 길을 선택하지 않고 좁은 길을 걸으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고민이 없었겠어요? 그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했습니다. 인터뷰 중에 그는 이런 말을 했죠. “생존이라는 문제가 눈앞에 있는데, 음악이라는 동화 같은 꿈을 쫓고 남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겠느냐는 고민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죠.” 국민가수 상금이 사상 최고 금액이기도 한데요, 상금 3억 원도 쓸 곳을 정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존심을 지키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방법으로 상금을 쓰기로 결심한 것 같습니다. 서울 화곡동에 열평짜리 집을 구할 때 어쩔 수 없이 손을 벌린 저에게, 엄마는 “동생 같은 얘기 하지 말라”며 평생 모은 돈을 빌려주셨다면서, 어머니께 진 빚도 갚고, 그동안 도와주신 분들을 위해 상금을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박창근 씨의 국민가수 우승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치색에 대해 일부 시청자들이 여전히 불만을 터뜨리는 경우가 있는데요, 그는 인터뷰에서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정확하게 알려면,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의 과거를 보면 도움이 되기 때문에 잠시 그의 과거 이력도 함께 전해드립니다.
박창근 씨는 1970년 11월 5일 경상북도 영주에서 출생했으며, 유년기 및 성장기 대부분을 대구에서 보냈고, 대구대학교를 졸업했다고 합니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수업 중에 듣게 된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으로 인해 처음으로 노래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해요. 대구대학교 노래패 소속으로 활동하다 음악보다 의식을 앞세운 노래패 분위기에 고민하던 어느 날, 허벅 문구에 이끌려 우연히 찾아간 공연장에서 보게 된 고 김광석 씨에게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김광석 씨 공연장은 동물원의 감성과 노찾사의 의식이 탄생시킨 이 시대 음유시인이라는 문구였습니다.
그는 순수와 의식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죠. 이후 대구 지역 대학가를 중심으로 음악 활동을 했고, 대학 시절 학내 집회에 참가하고 노래패 활동도 했지만, 이념의 틀에 갇혀가는 것 같아 결국 홀로 기타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결식아동 돕기, 노숙자 돕기 같은 일을 해왔다고 하죠. 결국 박창근 씨는 군 제대 후 가수의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1999년 정식 데뷔했고, 2012년부터 3년간 김광석 소극장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 주연을 맡았고, 대구에서 열린 김광석 노래 다시 부르기 대회의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습니다.
음악계에서는 그가 누구보다 김광석 노래를 잘 부른다고 알려져 있죠. 김광석 씨는 사회에도 정말 많은 음악인들에게 큰 영감을 주며, 아직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요. 임영웅 씨도 김광석 씨 노래를 들으면서 감성적인 노래를 자신의 주특기로 만들었다고 언급해 큰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임영웅 씨는 미스터트롯에서 부른 김광석 씨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로 이미 국민들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가수입니다. 박창근 씨 또한 김광석 씨의 노래들로 국민들의 감성을 크게 자극하며, 김광석 씨가 살아 돌아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생 때 저는 선배들과도 많이 다퉜어요. 의식화된 민중뿐만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에 고픈 사람들도 다 민중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사실 그동안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어요. 집회 현장에서 부르는 투쟁가요가 싫었거든요. 노동자의 권리를 대변하는 건 좋지만, 싸워서 이기고 죽이자는 것은 제가 용납할 수 없었어요. 굳이 말하자면 저는 민중이 아니라 대중파라고 생각합니다.”
박창근 씨는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해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원인 모를 열감과 배앓이에 시달리고 있고, 병원을 여러 군데 다녀보았지만 차도가 없어, 현재는 한약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이런 여러 가지 갈등과 긴 23년의 무명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건강관리 잘해서 아름다운 노래와 좋은 메시지를 많이 전해 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박창근 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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