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자라는 이름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경제사범이자 사기꾼으로 오래도록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큰 손’이라 불리며 남편과 함께 거액의 사기 행각을 벌였고, 그로 인해 대한민국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장영자 사건은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으며, 이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기도 합니다. 그녀가 일으킨 사건은 단군 이래 최대의 금융 스캔들로 불릴 정도로 그 충격은 컸습니다. 장영자와 관련된 피해자는 매우 많고, 그로 인해 고통을 겪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 상처를 못 잊고 있습니다. 특히 그녀로 인해 평생 고통을 받은 이가 있었는데, 바로 배우 김주승이었습니다.
김주승은 80년대의 청춘스타로, 그의 외모와 연기력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1983년 MBC 공채 16기 탤런트로 데뷔해 1986년 MBC 연예대상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8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김주승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는 장영자와의 연관으로 인해 갑작스러운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1994년 장영자의 부도 사건 이후, 김주승은 미국으로 도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사업을 잘 운영하고 있을 때였고, 그가 연루된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기 혐의와 함께 경제적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사업을 접고 도피 생활을 하게 되었고, 미국에서의 생활은 고달팠습니다.
미국에서의 고난의 시간을 마친 후, 김주승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연기자로 복귀했습니다. 그는 SBS 드라마 ‘형제의 강’으로 성공적인 복귀를 이뤄냈고, 이후 드라마 제작자로서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연기와 제작을 동시에 하며 그는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고, 그의 연기자이자 제작자로서의 열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또한 김주승은 연기자 처우 개선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그가 직접 제작한 드라마 ‘나도야 간다’는 따뜻한 가족 이야기를 다루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다시 한번 불행한 시기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1997년, 그는 신장암 판정을 받았고, 치료를 받으면서도 연기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암은 그의 몸을 점점 갉아먹었고, 2002년에는 상태가 호전되어 연예계에 복귀할 수 있었지만, 그 뒤로도 건강 문제는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습니다. 김주승은 다시 한번 암 진단을 받게 되었고, 이번에는 최장암이라는 더 큰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암 투병 중에도 그는 힘든 상황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았던 도움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하며, 아내와 함께 재기를 다짐했으나 결국 2007년 8월,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김주승은 생전에 시끄러운 인생을 살아왔고, 그 마지막 순간까지 조용히 떠나기를 원했습니다. 유족은 고인의 뜻에 따라 조문을 받지 않았고, 빈소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뒤늦게 소식을 들은 하희라, 김정현, 정보석 등 가까운 동료들이 그를 찾았지만, 유족의 뜻에 따라 조문을 하지 못했습니다. 고인의 마지막 유언대로 빈소는 아무도 오지 않은 채 조용히 비워졌습니다.
김주승의 마지막 가는 길은 매우 쓸쓸했습니다. 그가 남긴 따뜻한 마음과 소외된 배우들을 위한 열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그가 겪었던 고난과 아픔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미소를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배우였다는 사실은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