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산 다 잃고 반찬가게 전전하고 있다…” 아나운서로 잘 나갔다 투자사기로 쫄딱 망해버린 여자배우의 충격적인 정체

‘오영실’ 그녀는 과거 KBS 공채 아나운서로 <가요톱10>과 같은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 부터 <9시 뉴스> 주말 앵커까지 그 당시 아나운서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활동했습니다.


아나운서 시절 지금의 의사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이후 자신의 인생의 두 번째 꿈이었던 연기까지 도전해 완벽하게 잘 소화해내며 지금은 그녀가 배우라는 이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또한 그녀는 연기뿐만 아니라 뛰어난 입담으로 여러 예능 프로에서도 종횡무진 활약하며 오영실 특유의 긍정에너지와 활력을 선사해 시청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영실 그녀는 능력 있는 의사 남편과 본인의 유명세로 남부러울 것 없어 보였지만, 실제 오영실 그녀의 삶에는 우리가 화면에서 보던 그녀의 웃음과 달리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깊은 슬픔으로 가득했습니다.


한때 사탕발림 유혹의 손길로 전 재산을 잃어버리고 남편과 이혼을 준비하며 유서까지 써야 했던 방송인 오영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1965년에 태어난 오영실은 어린 시절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직업군인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셨고 가족과 늘 떨어져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는 여러 통조림을 집으로 소포로 보내주셨고, 이런 것들로 오영실 그녀에겐 아버지의 존재가 ‘그래도 어딘가에 계신다’로 와닿았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7살 때는 어머니가 한복을 곱게 입혀서 잔디밭이 넓은 아주 좋은 곳에 데려가 주셨는데, 거기서 어린 오영실은 티 없이 맑게 웃으며 비행기를 띄우면서 놀았지만 그곳은 베트남전에서 전사하신 아버지의 국립묘지였습니다.

그렇게 7살에 아버지를 떠나보낸 오영실의 기억 속에 아버지의 얼굴은 한 세 장면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어린 시절 걷지 못하는 자신을 안으면서 입이 찢어져라 웃고 계셨던 딸바보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습니다.

우울한 학창 시절을 보내던 오영실은 한번은 고등학생이었던 사촌 언니가 자신이 활동하는 방송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표정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고 했습니다.

당시 언니를 즐겁게 만든 기쁨의 원천이 방송반에 있다는 걸 알고 그때부터 방송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대학에 들어가서는 방송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아나운서의 꿈을 키웠고 4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방송국 공채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준비하고 치른 MBC 아나운서 시험에서는 단박에 고배를 마셨고, 하지만 KBS 아나운서에 최종 합격하게 되는데요.

이때를 그녀가 고백하길 “당시 아나운서를 지원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완벽한 사람들이었고 마지막 면접에 10명이 들어가는데 그때 누구 옆에 서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당시 연세대 브룩 쉴즈로 유명했던 ‘백지연’이 면접날 내 옆자리에 배정되었고, 나같은 단신이 이길 수 없다는 생각에 집을 가자마자 울고불고했다.” 그러나 정작 면접날 백지연은 볼 수 없었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백지연은 이미 MBC에 스카웃 되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KBS 15기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한 그녀는 앞서 얘기한 대로 예능 프로는 물론 모든 아나운서들의 꿈인 <9시 뉴스> 진행도 맡게 됩니다.


그렇게 그녀가 아나운서 시절을 보내던 중 그런데 이번에는 갑자기 ‘일을 그만둬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시 그녀의 대선배들이 나이가 들면서 단체로 ‘지방 발령’이라는 묵시적인 권고사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때 그녀가 그걸 보면서 ‘결국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 저게 나의 미래면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일이 너무 좋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선배들이 밀려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한 그녀는 결국 아나운서 자리를 10년 만에 박차고 나왔지만, 오히려 회사 밖은 더욱 녹록지 않았고 그렇게 아나운서를 그만두고는 3일 만에 후회하게 됩니다.


결국 ‘언제까지 방송을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은 최대한 자산을 불러야 한다는 강박으로 이어졌고 마침 연예계는 ‘좋은 게 있다’며 유혹의 손길을 보내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다들 당장이라도 일확천금의 주인공이 될 것 같은 사탕발림 같은 말들을 속삭였고, 결국 그녀도 부족한 형편에 융자를 받아 주식 투자를 하고 땅을 사고, 사업을 했지만 빚으로 시작한 재테크의 최후는 결국 빚이었습니다. 이때를 그녀가 고백하길 “사실 방송 일을 하면서 수도 없이 들은 말이 ‘언제까지 방송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였고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미래가 불안해서 빨리 준비를 해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항상 쫓기면서 살았다.


그런데 앞전에 무리하다 싶을 만큼 융자를 받아서 집을 산 적이 있는데 그게 순식간에 복덩이가 돼 부동산 재테크의 맛을 본 적이 있었고, 그렇게 한 번 재테크의 맛을 보고 나니 욕심이 커져 결국 그때부터 돌아올 수 없는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당시 10년 넘게 아는 분이 괜찮은 반찬 가게를 할 예정이라며 제대로 된 계약서도 없이 창업 투자 제의를 해왔다고 했습니다. 그때 당시 주변 사람들 열 명이면 열 명 모두 말렸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이인 만큼 믿고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고스란히 동업자에게 건넸으며 하지만 결국 그 동업자가 도망가는 바람에 투자금의 반의 반도 건지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는 사람이 ‘노른자땅’이 있다며 ‘땅 테크’를 추천했고 일단 10배 수익은 기본 보장이고 만약 5년 뒤 10배 보장이 안 될 경우 최소 2배라도 보장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도 주변에선 ‘기획 부동산 사기’ 느낌이 난다며 말렸지만 당시 어마어마한 수익률을 듣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번에도 빚을 내 땅을 매입 했지만 달콤한 말을 속삭이던 이들은 종적을 감췄고, 하지만 빚쟁이처럼 그 사람들을 끝까지 쫓아다니며 어느 정도 손실을 보고 나머지 돈을 끝내 되돌려 받았지만, 5년을 불안감 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이때 열심히 살아온 그녀의 인생길에 암까지 진단 받으며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는데 수술 전에는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유서까지 쓰며 펑펑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재테크로 망해 본 그녀가 말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풍족한 삶을 꿈꾼다. 때문에 한번 가열된 인간의 투기 성향을 잠재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투자를 하면서 풍족한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웠지만 인간이라는 존재의 ‘현재’는 언제나 궁핍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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