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속였다…” 효녀가수 현숙이 부동산 여왕 방미를 고소할 수 밖에 없었던 충격적인 이유

효도란 부모를 잘 섬기고 부모를 정성껏 잘 섬기는 일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아닌 동물들 중에는 부모가 죽을 때까지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동물은 아직 학교에 보고된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행동 양식 중 대표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수 현숙 은 28년간 중풍으로 누운 어머니와 7년간 치매를 앓은 아버지를 간병 힘도 없이 직접 병간호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사람들이 내가 아픈 부모를 모셨다고 하지만 그때도 부모가 나를 돌봤으며 편찮아 누워 계실때도 다녀올게 다녀왔어 그렇게 부비고 인사할 수 있었던 부모 품이 내 울타리 였다고 했습니다.

그런 부모의 든든한 울타리가 있었기에 지금의 현숙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효의 아이콘 현숙의 생애와 결혼까지 생각했던 한 남자와 의 이야기와 더불어 가수 방미를 경찰에 신고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전라북도 김제에서 12 남매 중 11째로 태어난 현숙은 학창 시절동네 노래자랑 에 참가해 생필품을 우승 상품으로 받아 오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장 아버지의 반대에 부닥쳐야 했으며 어릴 때 그녀의 가족이 살던 동네는 정씨 집안의 집성촌으로 부모님 두분이 모두 양반과 출신으로 솔직히 당시의 가수가 되겠다는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가수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고 기어이 가수가 되겠다며 서울로 가겠다고 선언했으며 아버지는 펄펄 뛰면서 반대했지만 그녀의 편이었던 어머니는 몰래 돈 만원 쌀 한 말 김치 한 통을 건네 주었다고했습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현숙 또한 눈물이 범벅 되어 서울로 올라왔지만 이후로는 더 많은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춥고 배고픈 어려운 시절이었으며 날마다 김치만 먹다 보니 어느새 나는 빈혈로 약국 앞에서 그만 쓰러져 약사님의 보살핌으로 3일후에 깨어난 적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스무살을 가수가 되겠다고 무작정 상경한 그녀는 힘든 일도 많았지만 결국 가수였던 김상범의 만남으로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김상범 은 현숙이 성격이 좋고 붙임성도 있고 목소리가 밝다며 가수로서의 성공을 점쳤고 스스로 매니저 역할을 자처 하며 본인의 가수 인생을 접고 본격적으로 현숙의 뒷바라지에 나섰다고 했습니다.

현숙은 데뷔와 동시에 뛰어난 외모와 그녀만의 독특한 비음 창법으로 대중들에게 시선을 끌었고 타국에 계신 아빠에게를 발표하면서 데뷔 이후 처음으로 가요계 바람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노래가 당시 중동 건설 붐으로 외국 지나간 근로자 가족의 가슴을 파고드는 등 달러 벌이에 나섰던 시대상을 반영한 했기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이후 작곡가 김정태에게 정말로라는 곡을 받아 1980년 초반에 인기를 누리던 가수 나미 방미와 나란히 견줄 정도로 최고의 경지에 까지 올라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1982년에 포장마차라는 노래가 가요 프로그램에서 몇 주간 1위에 오르자 이러한 현숙의 영향으로 대한민국 포장마차 매출이 엄청나게 오르기도 했습니다.

1984년에는 태극기를 소재로 한 건곤감리 청홍백을 발표하며 국민들의 응원가로 불리면서 인기가도를 달렸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현숙은 대뷔부터 줄곧 정상걸을 섭렵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하지만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가 도래 함으로써 가요계의는 세대교체 바람을 맞았고 이때 그녀 역시 여러 앨범을 발표했지만 모두 실패하며 긴 슬럼프를 겪게 되었다고했습니다.

한편 그녀가 한창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1980년에는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셨고 그녀가 내는 앨범마다 잘 안되며 긴 슬럼프를 겪던 1991년에는 아버지가 치매로 쓰러지셨다고 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그래도 거동이 불편했을 뿐이지만 아버지는 항상 옆에서 지켜 보아야 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밤새 소리를 지르고 현숙의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칩을 나가버리는 등 정말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고했습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수시로 기저귀를 갈아야 했고 공은 마치고 돌아오면 아버지 속옷에 이름하고 연락처를 바느질하는 게 일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간병인을 두지 않고 그녀와 육남매가 번갈아 가며 옆을 지켰으며 그녀가 바쁠 때는 자신의 차에 태워 함께 다니며 공연을 다녔다고 했습니다.

공연장에서는 돗자리를 앞에 깔아두고 그녀의 눈에 띄는 범위 안에 부모님이 머물도록 했으며 같이 다니면서 아빠 여기는 한강이야 엄마 저기가 방송국이야하면서 알아듣지는 못하시더라도 계속 말을 건넸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현숙의 부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는 이야기가 1995년 kbs다큐멘터리 사람과사람들에 방송되면서 시청자들은 현숙의 의구심에 반했고 이때 삽입곡으로 사랑하는 영자씨가 나왔는데 그것을 계기로 노래까지 히트되며 이때 긴 슬럼프를 벗어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영자씨로 슬럼프에서 빠져나온 이후 해마다 현숙의 히트곡이 한곡이상씩 나왔으며 보통의 가수들이 평균 5년에 한 번 이상 히트곡을 내기도 어려운 현실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효녀 가수 현숙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1996년에 아버지와 이별을했고 2007년에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게됩니다 어머니는 두 차례나 심장이 멎었다가 심폐소생술로 다시 소생 하셨지만 세번째 심장 마비가 오고는 선종하셨습니다.

장례날이 바로 현숙의생일이었다고 했습니다 생일날 고향 땅 선산에 어머니를 모시면서 현숙은 어머니가 내 생일을 보고 가시려고 무던히 애를 쓰셨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내내 가슴저리고 먹먹한 심정에서 벗어나기힘들었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몇일 뒤 방정리를 하는데 유품들이 모두 깨끗하게 남아 있는 것을보았는데 15년을 누워만 계셔서 예쁜 옷 한번 입어본 적이 없고 좋은 물건 한번 못 써 보신 흔적이었다고 했습니다.

곱기 고운 한복이나 옷들이 고스란히 있는 것을 보자 가슴이 미어졌고 기저귀도 좋은 것으로 많이 사다 뒀는데 한동안 기계로 대소변을 뽑아내 그것조차도 전부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중환자실 유리창문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무엇을 해야 어머니가 가장 기뻐하실까 고민해 봤는데 그때 평소 어머니의 원의대로 난치병 아이들을 도와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했습니다.

늘 남의 집 자식도 친자식처럼 챙긴 뒤에야 직성이 풀릴 만큼 따뜻한 분이셨고 이에 그 말씀에 아마 기쁘게 눈을 감지 않으실까 어머니도 현숙의 말을 알아 들으셨는지 아이들 수술을 돕겠다는 소리에 아주 밝은 모습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현숙은 어머니의 체온이 0으로 떨어지는 순간 그저 사랑한다는 말밖에 해 드릴 것이 없었으며 이제 어머니는 내 곁을 떠나 멀리 계시지만 어머니란 이세 마디는 여전히 현숙에게 너무도 큰 힘과 위안 처럼 남아있다고 했습니다.훗날 현숙에게 결혼할 뻔한 적은 없었나요라는 질문에 그녀가 대담하게 당연히 나도 결혼할뻔 한 적이있었다 그렇지만 부모님이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한 말씀도 못하시는데 나 혼자 행복하게 따고 결혼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한편 현숙이 1990년에 아픈 부모님을 모시고 긴 슬럼프를 겪으며 힘들어 할 때 방미를 사기혐의로 고소한 적이 있습니다.

현숙의 고소장에 따르면 방미가 본인과 몇몇 지주들이 신축중인 서울 서초구 3층 빌라로 현숙을 데려가 전망이 좋은 301호를 현숙에게 5억5000만원에 팔기로 계약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알고보니 전망이 좋지 않은 맞음편 302호를 줬고 이에 항의하자 방미가 나도 얼마전에 알았다면 발뺌하는 바람에 그 어렵고 힘든 시절 1억 여원의 손해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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