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세 젊은 나이에 어쩌다가 하늘도 무심하지” 임진모 아들이 젊은 나이 세상을 떠난 충격적인 사망원인 임진모 최근 전해진 안타까운 근황

부모를 잃은 자녀는 고아 아내를 잃은 남편은 홀아비 그리고 남편을 잃은 아내는 과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는 슬픔을 한 단어에 담을 수 없기에 부르는 말이 없다는데요.

음악 평론가 임진모가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냈다는데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 평론가를 꼽으라면 많은 사람이 바로 임진모의 이름 석 자를 떠올립니다.

임진몰은 음악 평론가라는 직업 외에도 팝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방송인으로 활약 중인데요.

더불어 음악 평론지 이즘의 창립자로 1993년부터는 30년 가까이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고정 출연에 음악적 곡연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음악인이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음악 평론가인데요.

가수 김현철은 그를 확고한 자신만의 철학이 있는 평론가라고 치켜세웠으며 보컬 김윤아는 인간을 읽을 수 있는 평론가라고 임진모를 평했습니다.

그리고 임진모와 20년 가까이 방송을 함께 하고 실제로도 절친하다고 알려진 배철수는 그를 대한민국의 거물 누구나 인정하는 평론가라고 칭했는데요.

임진모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알려졌습니다. 1959년생 임진모는 중 삼 겨울방학 때 당시 명동에 있던 코스모스 백화점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뒷골목에서 팝송이 입문했습니다.

그는 어릴 적 이 소령의 엄청난 광팬이었는데요. 명동 뒷골목에서 이소룡이 등장하는 스크린 로드쇼 등의 잡지를 구하다가 자연스럽게 팝송에 스며들었습니다. 물론 국내 가요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접했는데요.

비 내리는 명동거리 두매산골 안개 낀 장충단 거리 등을 부른 배우의 음색에 초등학생 때부터 취했고 그때부터 그의 가슴에는 음악을 향한 사랑이 싹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 전 맞이한 방학에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이 늘자 의도적으로 라디오 음악에 귀 기울였는데요.

존 레논 카펜토스 신중현 등 팝이나 가요드를 들으며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아름다운 노래들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는데요.

그런 생각이 나중에 평론가라는 직업까지 갖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꿈은 환영받지 못했는데요.

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조사하는 장래희망란에 그가 음악평론가가 되겠다고 쓰자 선생님은 임진모에게 쓴소리를 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음악 평론가로 현재 활동하는 사람이 누가 있니라고 질문을 한 선생님은 음악 평론가라는 직업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는데요.

당시 음악 평론가로 학문 평등이 활동하고 있었으나 두 사람은 각각 피디와 작곡 작가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음악 하면 가난해져 음악은 가난을 예약한다며 제자에 대한 걱정을 이어나갔는데요.

당시 세계 팝 시장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임진모는 입시에 집중해야 할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음악인의 꿈을 키우는 것이 여의치 않았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갖고 있던 입시에 관한 불안감은 음악을 들을 때야 비로소 해소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음악으로 해결하던 임진모는 열심히 공부해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는데요.

그가 사회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음악 평론가가 되려는 목표와 가장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꿈에 대한 열정이 엄청났던 임진모는 대학 입학 후 본격적으로 음악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는데요.

안타깝게도 대학 시절부터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지며 그는 일찍이 가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임진모는 84년 경향신문 27 기 공채로 입사해 기자 생활을 시작했는데요.

비판과 독서를 싫어했던 성격은 기자라는 직업에 맞지 않았고 결국 7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사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조언처럼 음악 평론가 다른 일을 동시에 시도했는데요. 임진모는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기 위해 음반 제작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경험 부족과 의욕과이므로 1년여 만에 3억 가까운 빚만 떠안았는데요.

엄두도 안 나는 큰 빚에 너무나도 힘든 생활까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습니다.

오랜 좌절과 우울감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93년 아카펠라 그룹 인공위성이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로 대박을 치며 빚을 청산할 수 있었는데요.

더불어 리얼리즘 팝아티스트의 원고를 쓰며 음악 평론가로서도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원고는 책으로 묶어 출판까지 되었는데요.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라는 임진모의 저서는 대형 서점 미달의 체코너에 선정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고 그는 이 책으로 유명세를 얻어 배철수의 음악 캠프에까지 진출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바빠진 임진모는 다른 일을 모두 그만두고 음악 평론가라는 직업에만 집중하기로 다짐했는데요.

2001년에는 대중음악 웹지니니즘을 만들어 국내 가요부터 해외 팝까지 골고루 다루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겠다는 그의 꿈이 이뤄진 것인데요. 안타깝게도 임진모는 꿈은 이뤘지만 늘 행복에 젖어 살지는 못했습니다.

임진모는 지금까지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91년 신문사를 그만두고 음악평론가의 길에 들어섰으나 밥벌이가 쉽지 않아 늘 경제적으로 힘들었습니다.

또 이혼도 겪었는데요. 그동안 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가장 그를 크게 슬프게 한 것은 지난해 들려온 아들의 비보였습니다.

임진모의 아들 임현주는 지난해 8월 6일 오전 한 시쯤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32세라는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말입니다. 오랫동안 알아온 뇌종양 때문이었는데요. 과거 한 인터뷰에서 임진모는 아들의 두병 사실을 알린 적이 있습니다.

27살에 아들이 뇌종양에 걸렸다 현재 방사선 치료 중이다.

건강하다는 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조건을 가진 것이다. 담담하게 밝힌 두 병 사실이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요? 임진모의 인터뷰로 미루어 짐작할 때 임현주는 최소 5년 정도는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난 것 같습니다.

5년간 치료를 하는 것도 굉장히 힘들었을 텐데요.

임현준과 비슷하게 이른 나이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등진 연예인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가을 동화에서 한체형 아역을 맡은 배우 예정입니다. 그녀는 스물 파리라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요.

의젓하고 씩씩한 모습으로 투병기를 기록하며 맞서 싸웠지만 결국 피보를 전해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녀는 생전 개인 홈페이지에 내가 혼자라고 생각하며 힘들어할 때 함께 아파해 주고 진심으로 위로해 주는 마음들 덕분에 잘해온 것 같아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씩씩하고 자랄게 고마워 사랑의 친구들아라는 편지를 남겼는데요.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하며 슬픔을 남겼습니다. 갑작스러운 비보도 슬프지만 그녀의 나이가 아직 채무핀 20살이라는 데에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요.

임진모의 아들 임현준도 향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뇌종양으로 떠나며 슬픔을 안겼습니다.

임진모가 아들상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네티즌들은 자식을 잃은 슬픔을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인 단장에 비교한다는데 임진모가 얼마 슬플까 32세면 너무 어린 나이인데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나다니 너무 안타깝다듬과 같이 애도를 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고인의 명복을 진심을 담아 빌어줬습니다. 임진모는 힘든 상황에서도 음악 평론가의 꿈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꿈을 이뤄 행복했다는데요. 아쉽게도 음악 평론가를 하면서 단 한 번도 경제적으로 넉넉한 적이 없어 때문에 후회되는 일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생활이 넉넉하지 않아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한 점이 항상 미안하다 매어 먼저 간 아들과 딸에 대한 애틋함을 드러냈는데요.

그럼에도 그의 자녀는 아버지의 꿈을 항상 응원하는 가장 큰 지지자였다고 합니다.

현재 임진모는 아들을 잃은 마음을 아직도 힘들지만 아들이 살지 못한 삶까지 최선을 다해 살 것이라는 생각을 밝혔는데요.

훗날 두 사람이 만났음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지을 수 있기를 바라며 임진모의 앞날을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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