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만은 현재 방송 메인 MC로 오랜 시간 활약을 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크게 화제가 되는 일은 없지만, 방송을 부드럽게 잘 진행하고 더욱 돋보이게 하는 능력을 인정받고 있죠. 하지만 김용만은 참 우여곡절이 많은 방송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고 여러 구설수에 휘말리는 등 결코 평범한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었는데요.
동료들의 시샘에 매장을 당하기도 하고 연속적으로 저지른 자신의 잘못으로 이혼설이 돌기도 합니다. 지금은 한없이 푸근해 보이는 인상의 김용만에게 어떤 시련과 고난들이 있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991년 제 1회 KBS 대학 개그제에서 대상을 받으며 김용만은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김용만은 해군 출신인데 군대에서 죽을 경험을 두 번이나 합니다.
인생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고 종종 수레했죠. 해군 홍보단 출신으로 6주간 훈련을 받았는데 사이 몸무게가 8킬로그램이나 빠질 정도로 힘들었다 원래 내가 평발인데 마지막 훈련이 8킬로미터 구보였다. 결국 완전 군장을 한 후에 연병장을 한 바퀴를 채 돌기도 전에 넘어졌다 그렇게 나 같은 나고병들끼리 또 달렸다 당시에 너무 힘드니까 이 사람들이 날 죽이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헛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니 수영장 위에서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소대장이 나한테 총을 겨누고 있더라 당시의 눈을 깜박일 때마다 사랑하는 동생들 부모님 친척 친구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때 열이 40도나 됐다.
열을 내리기 위해 누군가가 나에게 얼음찜질을 해줬다 그리고 내가 정신이 번쩍 들어서 옷을 홀딱 벗어 채 달렸다 당시 사람들이 나에게 김용만은 뛰어서 살았다. 그때 안 뛰고 누워 있었으면 죽었다라고 하더라 하지만 이후 또 고비를 넘기게 됩니다. 해군 홍보단으로 복무하면서 배를 타고 있었는데, 어느 날 24미터에 달하는 해일이 우리 배를 덮쳤다 당시에 고스톱을 치고 있었는데, 큰 해일이 오니까 쥐들이 위험한 걸 미리 알고 옆으로 다니더라 어느 순간 배에서 불이 나가고 배가 가라앉기 전에 퇴암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해군 홍보단 입대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지석진도 당시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죠.
잠시 뒤에 함장이 비장한 목소리로 우리는 이 배와 끝까지 함께 간다라고 말하더라 그때 다 함께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배는 암초에 걸렸고 김용만 지석진 등은 구4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게 됩니다. 행사의 고비 이후에 보너스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생사의 고비를 넘긴 사람은 다른 보통 사람들과는 삶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김용만의 경우는 그의 평온한 진행이 이런 과거 경험에 큰 영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김용만은 영화배우가 되기 위하여 서울의 전 방송연예학과에 입학을 했는데 주변의 권유로 개그맨으로 인생의 진로를 바꾸게 됩니다. 평소에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재치와 끼로 대중을 웃기는 스타일이죠.
90년대 초중반 김용만은 김국진 박수홍 김수용 등과 감자골 사인방을 결성하여 큰 인기를 얻게 되는데 또한 주변의 시기와 질투도 많이 받습니다. 선배들에게 질투도 많이 받았다. 기강을 잡자는 의미로 나와 건국진을 불렀다 그리고 우리가 녹화를 가기 전에 우리 따귀를 때리더라 그러면서 너희는 정리를 안 하고 뭐하냐? 녹화 들어가야 한다고 이러고 있느냐라고 하더라.
그때 따귀를 두 대 맞으니까 대사가 생각나지 않더라 하지만 따귀를 맞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더 열심히 녹화를 했다. 참고로 당시 발생했던 감자골 사건은 현재까지도 개그계에서 흑역사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워낙 연관된 사람들이 많고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나 무참했던 사건이었기에 피해자들 역시 이를 거이 언급하지 않고 있죠.
이후 김용만은 미국 유학 등을 거쳐 다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립니다. 전성기 때는 MBC 방송연 예대상에서 수차례 대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죠. 하지만 유재석과 강호동이 성장하게 되면서 어느새 김용만은 이 인자의 자리로 물러나게 됩니다. 또한 2000년대 초부터 최정상의 인기를 누린 그는 이러한 기세를 몰아 사업가로 변신하죠.
그전에 김용만은 1998년 5월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영재의 소개로 아내와 함께 술자리를 가졌는데 술자리를 마치고 김국진이 지금 아내를 집까지 데려다주기로 했었다. 그런데 김국진이 갑자기 나에게 데려다주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아내를 데려다줬고 이후 이영재에게 번호를 받아서 그때의 인연으로 결혼할 수 있었다.
김국진이 만약에 아내 이 남정을 데려다줬으면 또 어떤 인연으로 발전했을지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인 것 같습니다. 김용만의 아내 이남정은 미모가 워낙 뛰어나서 그녀를 미혼으로 오해한 후배 개그맨들이 대시를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절친 지석진의 증언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개그맨 이병진이 지금의 아내 되는 분을 만나기 전에 이런 일이 있어 이병진이 지방에 갔을 때 옷가게에서 정말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났다더라 이병진이 원래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적극적이다. 그래서 이병진은 여자분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는데 그녀의 남편이 옷 가게 밖에서 보고 있었다. 알고 보니 김용만이었다. 이에 이병진도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죠.
옷 고르고 있는 여성분이 너무 예뻤다 그래서 어떻게 다가갈까 고민 끝에 여자 선물을 골라 달라는 핑계로 말을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쳤다 알고 봤더니, 김용만이 임마 내 마누라한테 뭐하는 짓이야 라고 소리쳤다 지금은 모두가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과거의 에피소드가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김용만 이혼 재혼 루머가 떠돌기도 하죠.
그 이유는 김용만이 최고의 MC로 명성을 날린 만큼 돈도 많이 모으지만 또한 많이 잃기도 했기 때문에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시작한 사업은 2006년에 했던 의류사업입니다. 동대문 의류상가의 옷가게를 열었던 김용만은 당시 20대 초반의 남성들을 타겟으로 했던 남성복이었습니다. 그는 판매를 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작부터 디자인 작업까지 직접 참여했는데요.
하룻밤에 많게는 티셔츠만으로 1000만 원에서 적게는 500만 원을 벌었습니다. 이후 두 달 동안 꾸준히 매출이 올라 일본에 있는 네 개의 공장을 풀가동해 당시 유행하던 스키니진 바지도 만들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만들어진 바지는 일본인의 체형에 맞게 제작된 것이라 발목이 들어가지 않는 대참사가 일어납니다. 계속 재고는 쌓여만 갔고 청바지를 500원에 땡처리를 하는 불운을 맞았죠.
결국 김용만은 사업시장 6개월 만에 문을 닫게 됩니다. 이어 2009년에는 국수 체인점을 창업합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분식 프랜차이즈 업체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도 했었죠. 당시 고소장에 따르면 김용만은 자신의 이름을 딴 만두집체인 사업에도 참여하기로 해 놓고 돌연 사업 포기와 함께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고 했는데요.
이에 김용만 측은 사업적 기반이 미약했고 투자가 원활치 않은 등 업체의 사업 역량이 부족해 사업 참여를 철회했다. 고 밝혔습니다. 또한 관련된 계약 체결이나 계약금을 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법적 문제는 전혀 없다고 전했죠. 그는 외식 사업 당시 사업 영역을 확장해 여행사 사업까지 도전하게 되는데요. 의료사업 실패 이후 재기를 위해 선택한 사업이지만 이 역시 얼마 못 가 문을 닫는 비운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지석진과 함께 야심차게 시작한 여행사는 오픈하자마자 폭등한 환율과 신종플루의 대유행으로 위기를 맞습니다. 그가 펼쳤던 사업 중 제일 크게 실패한 사업이라고 하죠. 김용만의 사업 실패담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업을 향한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는데요.
2012년에는 개그맨 김수용과 함께 국내 최대 이벤트 기업을 운영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업도 예상만큼의 좋은 결과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사업에 그치지 않고 주식투자로도 큰돈을 잃습니다. 표영호라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이영애가 모 기획사로 갈 것 같다는 정보를 줘서 5000만 원을 투자했다. 이영애가 해당 기획사행은 사실무근이었고 주식은 급락했다. 10분의 1의 가격의 주식을 매도하고, 주식계의 세 곳이라는 별명까지 갖게 되었다. 아는 형이 지나가는 말로 좋은 투자 주식이 있는데, 너는 하지 말고 그냥 지켜보기만 해라 해서 귀가 솔깃했다.
1년 치 출연료가 통장에 그대로 있었는데, 돈을 주식을 조금씩 나눠 샀다 처음에는 주식이 상한가였는데 녹화 후 확인해 보니 몇 시간 만에 한가를 치더라 결국 모두 잃고 1년간 공짜로 방송 출연을 했다. 하지만 김용만을 둘러싼 구설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로 내기 사건이 터진 것이죠. 2013년 4월 상습내기 혐의로 김용만은 불구속 기소가 되었고 방송 활동을 중단합니다.
그리고 2014년 6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이 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런 사건을 이겨내고 다시 재기에 성공하여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 김용만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었기 때문에 이혼 재혼 등에 좋지 않은 소문도 함께 따라다녔던 것 같습니다.
김용만은 약 이 년 6개월간의 다숙 기간을 거친 후 2015년 쓸모있는 남자들로 다시 복귀를 합니다. 김용만은 복귀 당시 이렇게 말을 했는데요. 방송 복귀가 정말 조심스럽다 내가 조심스러우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장 내일 녹화인데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마이크를 차는데 반갑더라 3년 동안 입금이 없었다.
이런 논란을 겪으면서 김용만은 1년도 안 되어서 방송 복귀에 완벽하게 적응을 하면서 현재 여러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메인 MC로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천생 방송인인 듯합니다. 여러 논란을 극복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김용만이 지금처럼 계속해서 대중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해보며 이상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