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완이 23년이나 진행한 라디오에서 갑자기 하차를 당해 이후에 많은 이들의 의문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방송사 측은 단순히 프로그램을 새롭게 개편한다는 이유만을 드러내고 있지만 사실 비하인드에는 다른 충격적인 이유가 숨겨져 있었는데요.
그는 SBS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를 2000년부터 진행하던 중 갑자기 하차 통보를 받았고 마지막 방송에서 직접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다가 울컥하면서 목이 메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며 눈을 질끈 감았고 광고가 나오자 끝내 꾹 참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는데 이 장면이 보이는 라디오를 통해 그대로 생중계가 되자 모습을 보던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김창완은 이별은 준비 없이 하는 거구나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고 끝이라는 말을 안 쓰고 싶어서 다른 말이 없을까? 궁리했지만, 없다. 마지막이고 끝이다.
심하게 말하면 죽음이다라며 극도의 슬픔을 감추지 못했는 네, 그렇다면 김창완이 하차를 당한 이유는 무엇이고 이 과정에서 SBS에는 어떤 비하인드가 숨어 있었을까요? 김창완은 라디오뿐만 아니라 본업인 가수의 연기와 화가 활동까지 다양한 직업을 넘나들며 바쁜 스케줄 속 즐겁게 사는 듯보였지만 사실 그의 삶은 어릴 적부터 고난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어릴 적 경기도 김포시골 마을의 미팔군 군속 설계사 집 안에서 자랐던 김창완은 아버지가 엄하고 무서웠던 데다가 어머니와 금실도 좋지 않아 집안 분위기가 항상 무거웠고 거기에 아버지가 퇴직금을 전부 영화에 투자했다가 실패까지 하는 바람에 집안의 형편이 상당히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런 김창완과 당시 김포벌판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은 그보다 두 살씩이 많았는데 어느 날 일어나 보니 동네 친구들이 학교에 입학을 해 싹 보이질 않길래 어린 김창완은 무작정 학교로 그들을 찾아가 함께 수업을 들었고 그렇게 1년간 초등학교를 청강하자 결국 교장 선생님은 자신의 재량으로 정식 학생으로 인정을 해 김창완은 54년생으로 52년생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게 되는데요.
그는 이후 중 이 때는 하교길에 만나는 사람마다 왜 사세요라고 묻는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했고 또 고이 때는 창덕궁에 사생대회를 갔는데 빈둥빈둥 놀다가 그림 제출할 시간이 되자 도시락에 남은 밥풀을 도화지에 문질러 놓고 위의 낙엽을 확 뿌린 뒤 발로 밟아서 제출하는 비범한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목은 가을이었던 작품으로 당시 김창완은 학교에서 생각지도 않게 상까지 받았다고 하는데요. 그는 고등학교 때 막연히 미대나 음대를 가고 싶었지만 실기 시험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돼요.
재수를 생각했다가 담임선생님이 서울대 농대 잠사학과에 원서를 넣은 것이 붙게 되어 얼떨결에 서울대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는 학교들 사이에 서울대 진학 경쟁이 심했는데 서울대에서도 인기가 높은 과가 있고 문턱이 낮은 과가 있었지만 무슨 과를 들어가든 다 서울대를 합격시켰다고 할 수 있었기에 선생님은 비인기과에 원서를 넣었던 것이었는데요.
김창완은 처음에 잠사학과에 붙었다는 소식을 듣고 잠수를 배우는 과인 줄 알고 잠수복을 사러 남대문시장에 가려고 했을 정도로 뭘 배우는 과인지도 몰랐다가 알고 봤더니, 누에와 섬유를 배우는 학과라서 실망을 하게 되는데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 농대생들은 뻔하다와 빠나다로 분류됐어요. 농대 졸업생들이 보통 가는 직장을 가면 앞날이 뻔하다고 했고 방송사나 은행 같은 다른 쪽으로 진출하면 잘 안 될 게 뻔하다는 뜻이었죠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김창완은 과거부터 집안형 편도 안 좋았는데 이후 아버지가 건강까지 악화되시며 무려 28년이나 몸전 우시게 되다 보니 그런 집안 형편상 사립대에 가기는 어려우니 그냥 붙었으니까 다닌다는 심정으로 그렇게 잠 반사학과를 다니게 되는데요. 17의 나이로 대학에 들어가 도화지에 빨강 파랑 노랑 원색으로 그림을 그려 온 벽에 도배를 해놓기도 했고 후에 대학 졸업을 앞두고는 방에서 바리깡으로 머리를 싹 밀어버리고 졸업식 때는 가발을 쓰는 등 뭔가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던 만큼 특이한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김창완은 대학교 1학년 당시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집에 5000원짜리 기타를 뜬금없이 사가지고 오게 되는데요. 당시 저걸 한 번사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했던 그는 큰 기대까지는 하지 않고 그저 기타 교본을 보고 연습을 하면서 학창 시절 음악 시간에 배운 악보 쓰는 법을 떠올리며 정식 작곡이라기보다 그저 흉내를 내가면서 한 달 만에 외가라는 곡을 쓰게 됩니다.
너 갑자기 이후 이 사연이 알려지면서 삼 형제에게는 음반 기획사로부터 앨범 제작 제안이 들어오게 되는데요. 김창완이 취미로 만들어 놓은 곡이 100여 곡이나 있었던 데다가 동생들이 학업에 전념하기로 하면서 삼 형제는 그동안 작곡해뒀던 곡이 아까워 정리하는 기분으로 기념용 음반을 만들기로 했고 음반사 사장은 그들에게 산올림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됩니다.
이때 추입한 앨범이 바로 산올림의 일 집 아니벌써였는데요. 산울림의 일 집 앨범은 지금 내놓아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센스로 무장되어 있었던 독보적인 매력을 자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노래들이 이내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음반 하나 갖고 싶다는 생각으로 취미 삼아 만들었던 곡들이 의외의 좋은 반응을 얻게 되자 김창완은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준비 중이던 은행 입사 시험을 포기하고 본격적인 산올림 활동에 돌입하게 됩니다.
일 집의 대표곡이었던 아니벌서는 황당한 느낌이 들 정도로 유머러스한 가사에 경쾌한 멜로디로 당시 주류 음악 시장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게 되는데요. 창문 박기 대중들은 한마디로 골 때리는 음악이 나왔다며 산올림 돌풍에 휩싸이게 되었고 일 집 앨범이 21만에 무려 40만 장이나 팔렸습니다.
산올림은 데뷔 1년 만에 문화체육관에서 첫 단독콘서트까지 열게 되는데 공연 당일에는 관객들이 새벽부터 장사진을 쳤고 무대는 관객들이 던진 꽃으로 뒤덮이는 난리통이 벌어지며 그들은 콘서트마저 많은 화제를 낳게 됩니다. 또한 같은 해 TBC 가요대상에서는 중청부문상을 수상하며 레이저 음악 시장까지 평정하는 기염을 토했고 1977년생 아이는 산울림둥이로도 불려졌을 정도로 당시 산울림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는데요.
일 집의 성공으로 산울림은 이미 만들어 놓은 곡이 워낙에 많았기에 이후 이 집 삼 집 등등 정규 음반을 줄줄이 발표했고 개구쟁이 꼬마야 어머니와 고등어 산할아버지 내 마음의 주단을 깔고 등 수많은 히트곡을 넘기며 한국 각 밴드의 전설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산올림 매곡들은 과거 유신 정권의 어두웠던 시절에 동요 같은 노랫말 서정적인 사운드로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했고 김창완은 당시의 인기에 대해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가공을 거치지 않은 순수한 형태로 대중에게 접근했고 이것이 좋은 반응을 얻은 게 아니었을까라고 평가했는데요.
그러나 산올림의 노래들은 이후 퇴폐라는 황당한 이유로 심의에 걸려 앨범이 전면 계장 명령을 받기도 했었다는 사연이 알려지기도 했는데 그때는 술 마시고 노는 걸 가사로 표현하면 폐패라고 하던 시절이라 가령 원곡의 가사가 술 먹고 밤새도록 기타 치고 놀자 놀다 보니 날이 밝았네였다면 날이 밝을 동안 뭐했냐 이렇게 고쳐야 했고 또 어떤 것은 너무 슬프다 이건 말이 안 된다라는 등의 이유로 검열을 당해 가사를 상당 부분 고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폭발적이었던 인기와는 달리 당시 김창완 형제는 돈은 전혀 벌지 못했다는데 앨범을 사 40만 장이나 팔았지만 당신은 저작권이 확립돼 있지 않았고 에코드사와 가수는 계약서도 쓰지 않았던 시절이라 당신은 돈을 주면 받고 안 주면 말았던 그런 시절이었다고 하는데요.
또한 한 번은 지방에서 공연을 했는데 개런티를 몇 푼 주는 걸 그때는 숙맥이어서 감히 받지 못하고 서울 올라가서 주십시오라고 했다가 나중에 서울에 와서 달라고 했지만, 그때 가니 돈을 주지 않아 받지 못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리숙하고 순진했던 김창완이었지만 당시 그에게도 어느 날 사랑이 찾아오게 되는데 그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아내 강기빈 씨와 어릴 적 졸업 이후 쭉 보지 못했다가 대학생이 되어 독서 모임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는데요.
김창완은 이 년 일찍 학교를 들어가 두 살 연상이었던 그녀를 다시 만난 당시를 회상하며 당시 초록색 파카의 긴 생머리를 한 그녀의 뒷모습에 한눈에 반해서 데이트거리를 만들기 위해 책을 빌리곤 했어요. 의대생인 그녀가 빌려준 책은 주로 해부학과 같은 의학서적이었죠. 결국 독서형보다는 취침용 베개로 이용되었지만 이 책을 계기로 5년의 연애를 하고 결혼하게 되었죠.
현실감이 없더라 라고까지 말해 하차 통보를 받고 실감이 나지 않았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음을 털어놨는데 SBS가 밝힌 DJ 교체 이유는 시대가 변해서 대대적인 개편이 필요하다였고 이 말은 즉 오래되고 늙은 사람을 빼겠다라는 얘기였으며 배경에는 SBS의 모기업이자 최근 적자에 허덕이던 태형 건설이 480억 원의 대출을 갚지 못하면서 부도 위기를 막게 되어 이로 인해 SBS를 매각하는 것까지 검토를 했을 만큼 자금 위기가 닥치는 바람에 김창완이 나이를 많이 먹어 경쟁력이 사라지고 있다고 판단한 SBS의 경영진이 방송국의 적자 규모를 줄이고자 하는 방안의 하나로 오랜 사랑을 받아온 그를 퇴출한 것이었습니다.
최근 SBS가 세상에 이런 1위를 방영 26년 만에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는데 그러나 SBS 라디오는 최화정과 최백호 컬투 박소현 등 수십 년간 진행자를 바꾸지 않는 프로들이 많고 그 이유는 변화에 민감한 티비와 달리 라디오는 매일 같은 시간에 프로를 듣는 고정청취자의 규모가 중요하기 때문에 청취율을 높게 유지하기 위함인 것인데 청취자 입장에서는 늘 하던 사람이나 오는 게 듣기가 더 편하지 갑자기 사람이 바뀐다면 오히려 당황스럽고 어색해서 더 안 듣게 되지 않을까요?
게다가 김창완이 빠지고 배우 봉태규가 투입이 됐는데 어떻게 이토록 느낌이 너무 다른 인물을 그 자리에 대신 넣을 수가 있는지 SBS는 23년을 쌓아온 공든탑 같은 거대한 고정 청취 집단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너무나 이해하기 힘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댓글에서도 결혼해서 이 방송을 들으며 태교를 했던 아이가 지금 군대에 가 있다.
라디오의 매력은 익숙함과 편안함인데 DJ 본인이 원하지 않는 하차는 너무 슬프다 눈물을 꾹꾹 참고 계시다가 마지막에 흘리시는 모습에 같이 마음이 아팠다 변화는 당연하지만 익숙한 것들도 함께 가야 하지 않겠나 등 다수의 대중들이 섭섭하다는 의견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23년이나 한 프로를 꾸준히 진행하며 성실하게 임해왔건만 김창완은 그렇게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방송사 모기어 베이기로 프로그램에서 내쫓기고 말았는데요. 그가 젊은 시절 만들어낸 음악들이 40년이 지나도록 꾸준히 불리워질 정도로 대단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김창완도 이번 일로 꺾이지 말고 계속해서 꿋꿉한 활동으로 굳건히 대중들 곁에 남아주기를 바라며 김창완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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