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아나운서 외기를 거른 김동건 씨의 인생은 마냥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북한의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인 실향민이자 이산가족인데요. 불과 세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마저 전쟁 때 납북돼 이모와 이모부를 어머니 아버지로 부르며 자랐어요. 유일한 피붙이었던 형과 전쟁통에 헤어져 고아가 될 뻔한 위험천만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이런 그가 아나운서가 되었는데요. 항상 평정심을 잃지 않고 점잖게 방송을 진행하는 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었는데 어느 순간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추지 않고 방송을 중단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는데요.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평양 남북내술 당공연 이산가족 찾기 파독 30주년 중동 근로자 위문 공연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순간에 언제나 마이크를 들고 서 있었던 김동건 씨 이런 그가 지난 2023년 방송 인생 60주년을 맞았습니다. 김동건 씨의 60년 아나운서 인생은 돈과 권력을 쫓지 않아 가능했다는 평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본 오로지 한 가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60년 동안 날 봐준 시청자들 덕분이지요 사람 외에 또 나와 하면 방송에 나갈 수 있겠어요.
국민이 없는 정부가 없듯이 시청자 없는 방송이 없지요 이토록 아나운서의 역할에 진심인 분인데요. 그는 어떻게 아나운서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전축이 있는 방에 들어가 문을 걸고 혼자서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학교에선 도시락을 쌌던 신문지를 펼쳐들고 아나운서인 양 뉴스를 낭독했습니다. 빙 둘러선 아이들이 와 똑같다며 감탄했습니다.
라디오 공개방송이 있는 날엔 운동장에서 종일공을 차다 정동에 있는 방송사로 갔다고 해요. 경비 아저씨가 너 또 왔구나 할 정도였죠 자리가 없을 때는 계단의 책가방을 깔고 앉아서 구경했어요. 장기범 아나운서에 스모 고개를 정신 놓고 봤다고 합니다. 1963년 3월 일 마침내 아나운서가 된 그는 우리들 세계 열한 시에 만납시다 한국인 등 수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요.
그중 KBS 가요무대는 김동건과 동의어가 될 정도죠 1985년 11월 18일 첫 사 회를 본 뒤 무려 30년을 진행했습니다. MBC 조선왕조 500년을 비롯해 다른 방송국의 드라마들이 가요 무대 때문에 시청률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죠. 타 방송에서 드라마 만드는 피디들이 가요 무대 시청률 따라잡는 게 목표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한창 가요 무대가 잘 나갈 때는 이미자 조용필 등 지금은 전설이 된 가수들이 총출동했다고 합니다.
김동건 아나운서는 이렇게 가요 무대를 평가했습니다. 우리 가요의 명맥을 되살려 놓은 프로그램이었죠. 눈물 젖은 두만강 신라의 달밤 전선야곡 같은 명곡을 어디 가서 들을 수 있겠어요.
1940년에 만든 나그네 설움 같은 노래는 일제 마렵 강제징용을 피해서 만주벌판을 헤매던 남편 아들들의 애환과 역사가 담긴 노래예요. 곡들을 가요 무대가 다시 살려낸 겁니다. 가요 무대를 진행하며 들은 곡만 해도 무려 9만 곡이라고 하는데요. 자연스럽게 그는 귀명창이 되었습니다.
첫 소절만 들어도 이놈은 됐다. 아니다. 하는 생각은 들어요. 나훈아가 노래를 잘 부른다 하는 건 노래를 하지 않고 말을 하기 때문이에요. 말에다 음악을 입힌 거죠. 노래를 못하는 사람들은 음악에다 말을 넣어요. 음악을 따라가느라 말이 죽지요 나훈아의 머나먼 고향은 노랫말만 들어도 감동하게 돼 있어요.
근데 요즘 가수들은 그걸 막 걷고 뒤집기만 해요. 현란할지는 모르나 감동은 없지요 난 쇼크 반지 다리 많은 세월을 국민과 함께하며 굳고 아나운서로 부릴 만큼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는데요. 배경에는 바로 이런 아나운서에 대한 신념과 철학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만년 있는 듯 없는 듯 시청자들이 묻고 싶어하는 걸 대신 물어주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것 대통령의 말 정치인의 말 아나운서의 말은 신뢰와 겸손히 생명이에요. 그런데 이런 그가 전혀 뜻밖에도 정치 권력 때문에 수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고 새로운 사장이 부임하면서 20년 가까이 진행하던 가요 무대에서 하차하게 되었는데요.
요즘 전국 노래자랑에서 김신영 이효리 씨 등이 갑자기 하차를 당하는 것 같은 수모를 겪은 거죠. 이에 대해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사장이 새로 와서 MC 하나 못 바꾸냐 했다고 합니다. 또한 진행자는 언제든지 교체될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크게 상처를 받고 말았습니다.
속이 상해서 부산으로 내려가 이틀간 술만 먹고 지냈는데 방송국에서 나를 찾고 난리가 났대요 노무현과 코드가 안 맞아서 내가 잘렸다는 보도가 나가니 새로운 사장이 곤란해져서 가요 무대에 나와 감사패를 받아달라는 거죠. 예능 국장이 100번도 넘게 졸으니 후배 하나 살려주자 하는 심정으로 마지못해 올라가긴 했어요. 그를 다시 가요무대에 돌아오게 한 건 시청자들이었습니다.
유행 지난 양복 두 벌을 번갈아입으며 그저 반듯하고 예의 바르게 진행하는 이 고지식한 아나운서를 시청자들은 신뢰하고 사랑했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KBS의 중립성이 논란이 되는데요. 이에 대해 그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KBS가 중립을 지키려면 정부로부터 자립을 해야 해요. 정부에서 추경을 따서 직원들 월급 주는 회사가 어떻게 정부 눈치를 안 봅니까 영국민의 자부심이 된 BBC처럼 되려면 1981년 오공 초기에 정해진 시청료 2500원을 현실적 수준으로 올려야 해요. 국민 저항이 크겠죠.
하지만 내 생각은 KBS는 정부 예산을 받거나 광고를 일절하지 말고 수신료로만 운영하게 하는 거예요. KBS 이티비는 민간에 팔고 대신 교육 방송을 가져오고요. 하루아침에 되진 않겠지만, KBS가 한국민의 자랑스러움이 되려면 길밖엔 없습니다. 김동건 아나운서는 1983년 전국을 울린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도 진행했는데요.
딸을 확인한 어머니가 실신해 아수라장이 된 스튜디오에서 이게 무슨 비극입니까? 했던 장면은 지금도 회자됩니다. 그때 소회를 그는 이렇게 밝혔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나 깨나 잃어버린 딸 생각만 하면서 살았을 거 아니에요. 어디에서 식모살이는 하지 않나 밥은 굶지 않나 이게 무슨 비극인가라는 탄식밖엔 나오지 않더군요.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황해도 사리원 정방산 밑에 어머니 묘지가 있고 전쟁 때 납치된 아버지는 살아계신지 돌아가셨다면 무덤은 있는지 알 길이 없는데 내 앞에서 울고불고 하는 사람들은 어쨌든 가족을 만났으니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후 이 년 뒤인 1985년 남쪽의 예술단을 이끌고 평양에 갈 일이 생겼는데 그때 놀랍게도 유서를 써놓고 갔다고 합니다.
내가 이북서 피라는 사람이고 아나운서 청소하면서 김일성 욕을 많이 했기 때문에 평양엔 절대 가지 않겠다고 버쳤어요. 그랬더니, 장세동 안기부장이 찾아와서는 김동지 이건 나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지엄한 나라의 명령입니다. 그래요.
어머니가 알면 까무러치실 테니 티비부터 고장났다고 치워놓고 내가 제일 믿는 후배에게 유언을 하고 갔지요 내가 만일 못 돌아오면 우리 색시를 너희 아내처럼 똑같이 돌봐주고 우리 애들도 너희 애들처럼 똑같이 키워달라고 그렇게 목숨을 걸 정도의 극도의 긴장감을 가지고 북한에 갔는데 막상 그곳에서 방송을 진행하는 그는 아주 여유가 넘쳤습니다. 재미있는 이유가 있죠. 막이 오르길 기다리면서 초조해하는데 평양 대극장 지배인이 다가와서 물어요.
김 선생 전투 준비는 끝났소 그래서 그냥 하던 대로 합니다. 했더니, 이번에는 지령장을 볼 수 없습니까? 해요. 지령장이 뭔가 했더니, 방송 순서를 적은 큐시트 음향실은 소리초소라고 하고요. 순간 내가 방송하는 걸 전쟁한다고 말하는 나라에 와 있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더군요. 돌연 마음이 편해졌어요. 이렇게 긴장100배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였으나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있는 독일과 한국 근로자들이 많은 리비아에 갈 때였습니다. 파독 30년 되던 1993년 서부 독일에 갔는데 5,6000 명이 모였어요. 간호사들은 죄다 한복을 입고 왔구요. 현지에서 고용한 독일 오디오맨과 카메라맨들이 나더러 대체 이게 무슨 프로그램이냐고 물어요.
내가 한마디 하고 가수가 한 곡 부를 때마다 사람들이 우니까 공연이 다 끝났는데도 안 가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우니까 베를린에서 8시간 자동차를 운전해서 왔다는 한 남자는 공연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울어서 나도 무대 아래로 내려가서 같이 울었어요. 이렇게 사실은 누구보다 가슴이 따뜻했던 그는 방송 도중에 그만 눈물이 터져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방송이 중단되는 사태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인이라는 프로에 소년소녀가장 셋이 나왔어요.
대본을 미리 보니 할머니와 둘이 사는 6학년 아이가 학교까지 30 리를 걸어서 다닌대요 그래서 내가 아이에게 꼭 자전거를 사주리라 마음먹었지요 그러고 방송이 시작됐는데 내가 아이에게 무엇이 제일 갖고 싶으냐 물으니 아이가 글쎄 어머니라는 거예요. 아이고 그때부터 내가 눈물이 나오는데 멈추질 않아서 방송이 한 시간 이상 중단됐어요.
사실은 그에게 기가 막힌 사연이 있었습니다. 세 살 때 헤어진 자신의 친모가 떠오른 겁니다. 길러주신 어머님 사실은 이모죠 이모가 팔순이 넘은 어느 날 나를 불러서 사진 석 장을 주세요. 이젠 너도 결혼해 자식을 낳았으니 알아도 되겠다. 이게 너의 친어머니다. 나는 너의 큰이모고 그날 밤 20대의 어머니 사진을 펼쳐놓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인생이고 거기서 제일 중요한 건 실례라고 믿는 김동건 아나운서는 방대한 인맥으로 소문이 자자한대요 아들이 어릴 때 아빠 나한테는 왜 이렇게 삼촌이 많아 물었을 정도 방송가에선 밥 잘 사주는 선배로 유명하다고 해요. 누가 돈을 다 어떻게 대냐고 물어요. 근데 후배들에게 밥 안 사주고 돈을 모았다고 해서 63빌딩 이 내 것이 되겠어요.
KBS 아나운서실에는 김동건 상이 있어 매년 가장 돋보이게 활약한 아나운서에게 김동건 아나운서가 금 한 냥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고 해요. 또한 산악인 박영석 씨부터 LG 구본무 회장까지 스스럼없이 지냈던 그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준 인물은 연세대 김동길 박사 2022년 김동길 박사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이도 연세대 의과대학의 시신을 기증하는 현장에 함께한 이도 김동건 아나운서였다고 합니다. 그는 김동길 박사는 내게 형님이고 스승이고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라고 수레했습니다. 어떤 점이 그렇게 존경스러웠을까요?
선생님처럼 되는 게 내 소원이었어요. 서슬 퍼런 유신과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그는 남자로 태어나 무서운 게 없는 사람이었죠. 강한 자에겐 강하고 약한 자에겐 한없이 따뜻하고 집 통장 그리고 자신의 몸까지 세상에 다 내주고 빈손으로 떠나셨죠 마지막으로, 그는 힘들어하는 청춘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억대의 연봉을 받는다. 출세를 했다. 그런데 나이가 80이다. 그러면 난 그거 안 하겠어요.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젊음을 사죠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청년들이 나는 제일 예뻐요 젊다는 자부심이 있으니 당당하게 일하는 거예요.
사실 그는 대단한 동안인데요. 벌써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인터뷰에서 인생 선배 김동건 씨의 이 말이 가장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한 번밖에 초대받을 수 없는 자리라는 김남조 시인의 말을 좋아해요. 이 말을 들으니 늘 인생은 너무나 허무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한 번밖에 초대받을 수 없는 이 인생을 좀 더 행복하게 살다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품위 있고 고상한 인생을 몸소 자신의 삶으로 보여준 김동건 씨에게 한없는 경의를 표하며 건강하게 오래오래 우리와 함께 해주시기를 기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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