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순천이 전원일기 캐스팅 당시를 회상하며 화제가 되었습니다. 박순천은 당황스러웠던 캐스 기억을 털어놨습니다. 박순천은 저를 전원 임기에 처음 캐스팅한 분이 김한영 감독님이다. 여의도 3층 사무실에서 뵙는데 갑자기 유인촌 선배님이 남편감으로 어떠고 묻더라 그때 저도 천엽 선배님도 총이었다. 배우 한 감독님이 작품이 아닌 다른 얘기를 하는 게 불쾌했다.
그저 제가 부모님께 물어봐야 한다고 하니까 그게 아니라며 당황시더니, 전원일기 둘며느리 캐스팅 이야기 꺼내셨다라며 웃었습니다. 너무 그리웠던 배우 박순천 그가 그간 살아온 인생 이야기와 근황에 대해서 알아겠습니다. 박순천은 1961년 2월 19일생으로 1980 11년 MBC 13 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습니다. 박순천의 학력은 신성여자고 학교를 나온 뒤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를 졸업했습니다. 김 회장 댁의 둘째, 며느리 김용식의 부인은 박순천으로 잘 알려진 탤런트입니다.
박순천은 제주도 출신이며 고두심과도 친분이 있습니다. 그녀 연예계에서 제주도 출연기자로서 활동하고 있으며 고두심과 함께 제주도 출신 대표 연예인으로 제주도 홍보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드라마 촬영이 끝 후에는 집에서 아내로서 가정을 꾸리고 있으며 제주도를 유네스코 7대 경관 홍보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박순천은 원래 제도 출신은 아니며 중학교 이 학년 때 충남 금산에서 제주도 이사를 갔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금산에서인 농사를 짓다가 제주도에서 농장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농장이고 하면 드넓은 초원에서 한가름 노는 말이나 소가 떠오르서 평화로운 광이 떠오르지만 사실 그것은 잘 모르는 사들의 상상에 불과 합니다. 박순천입니다. 어느 겨울 소가 일어나지 않아 소를 살리기 위해 부모님께서 매우 고생하셨던 모의 생각나면 가슴이 설레고 내적으로 감동을 느낍니다.
저는 박순천의 가족 구성 중 맏딸로 우리 가족은 일 5년대 가이였습니다. 아버지는 훤칠한 미남이시 어머니는 발 애교 넘치며 미인이습니다. 다행히 두 분 다 여전히 건강하 계시지만 최근 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아 어머니가 항상 아버지를 돌보게 되어 어머니의 고생이 크다는 것이 속상합니다. 저는 22년 동안 전원일기 속에서 둘째, 며느리 수명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유촌과 저를 실제 부부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박순천의 이모할머니 차 돌아가시기 전까지 유인촌을 조카 사위로 알고 계셨다고 하네요. 또한 제가 배우 박순찬라는 이름과 겹치기 때문에 혼동대 경우도 종종 어떤 사람들 박순천이 시대를 잘못한 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가 갸름한 얼굴에 오밀조밀고 또렷한 이목구비로 한국적이면서도 이적인 외모를 가고 있다고 하는데 박순희 리즈 시절의 미모가 현재와 같았다면 큰 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데뷔 당시에는 연예인의 외 기준이 현재와 많이 다르기 때문에 빛을 발하는 케이스가 되지 못했습니다. 박순천은 리즈 시절의 잡지 모델로 활동하며 주목받을 만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최근에 연예인으로 데뷔했다면, 큰 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박순천 배우로서의 역량과 매력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린 시절 박순천은 일남 모녀의 대족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책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집에 온 과자 선물 세트를 그대 맞은 박순천에게 준 이는 동생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박순천 동생들에게 공하게 나눠주기 위해 항상 동생들 다 적게 먹언만 이를 통해 누나 언니로서의 책임감을 뱉습니다. 또한 동생들이 싸워도 항상 혼나는 건 맞이하던 박순천은 때로는 동생들이 왜 싸웠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손바닥을 맞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박순천은 책임감과 현관에 화해 중요시하는 가치를 배웠습니다.
부모님은 박순천에게 맏이로서의 책임감과 권한을 한꺼번에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당시의 토끼털 코를 사주셨는데 그것은 당시의 쌀 한 가마니 값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학교에서는 한마디로 치맛바람이었죠. 제가 합창과 무용 등을 했었는데 예술제에서는 항상 주공이었습니다. 예제 연습을 하면 어머니는 우리 반 친구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선생 부모님 비누 세트 선물하셨어요. 당 당시 대부분 학부모들은 삶은 계란을 선물하곤 했었거든요.
이런 어머니의 응원이 저의 소심하고 내적인 성격을 바꿔주었습니다. 박순천은 초등학교 이 학년 때 한국무용을 시작하 중학교 1학년 한때 웅변을 하서 재능을 발견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바꿀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 부모님은 박순천의 연기자의 길을 반대했다고 하네요. 처에는 연기 공부해서 교수가 되려고 했지만, 서울외대 연기과에 들어가 탤런트 공채 시험에 합격하면 연기의 기를 꺼뛰었던 것입니다.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에 진학한 후 원래는 교수가 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실 저도 연기자가 되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동생들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어서 공예 지원했더니, 우연히 합격화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연기의 길을 걷게 되었죠. 신인 시절에는 모래시계를 연출한 김종학 감독님 때문에 자신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날 김종학 감독님이 시인아 가라고 능이 없으니 시집을 보내고 어머니께 말씀하셨다고 하더군요. 순간 옥이 생겨서 연기를 더 열심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김종학 감독님이 저를 캐스팅해서 작품 뒤풀이 장소에서 제게 시집가냐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아직도 시집가는지 물었던 감독님이 긍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작품에도 캐스팅 하셨고 메릴 수립 같은 여배우가 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제가 결혼하기 전날에 일에 대 욕심을 버리지 않을 거면 늦지 않았다.
결혼하지 마라라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잊을 수 없고 사라보 연기와 일 사이에서 적절한 선을 찾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평생 엄마 말이 다 맞다고 생각며 살고 있습니다. 박순천의 작품 중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전원일기입니다. 당시 양철리 김 회장 댁의 둘째, 며느리로서 역할을 맡은 저는 눈치 없고 야룬 신세대 며느리를 잘 소했습니다.
전원일기 캐스팅에 대해 이야기하면 제가 일 기 캐스팅된 후 감독님과 작가님이 직접 부모님을 만나서 제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 확인하고 작품 속의 수명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고 말들였습니다. 그에 대해 고도심은 당시 순천이 얄미웠다며 중간에서 막 이간질도 살짝살짝 하면서 극중 박순천의 역에 대해 회상했습니다.
또한 박순천은 당시 시골에 내려가 가끔 할머니 형님 말 좀 잘 들으라고 하곤 했다며 웃셨습니다. 80대 기준으로는 신세대 며느리였던 캐릭터스입니다. 박순천의 남편인 김철이와의 첫 만남 박순천은 대학교에 들어가서 첫 소개팅에서 만다고 합니다. 남편과 처음 만난 8년이 생각나네요. 남편은 당시 저와 소개팅을 하러 옆구리에 책을 끼고 카페에 들어왔죠 남편이 소개해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제가 대해서 먼저 애프터 신청을 했어요.
이후 박순천의 남편 김철이는 수업을 제끼면서까 박순천을 만나 위해 오래대를 찾았고 결국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됩니다. 2013년 여유만 만한 마음으로 출연한 박순천은 TV 편지 쇼 코너에서 남편 김철이에게 마음을 담아 손편지 남겼습니다. 편지는 10월의 첫눈이 온 날 철희 씨가 찾아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 어렸을 때 코코아를 마시고 싶어하는 마음을 귀신이 알고 미리 타놓은 것을 언급하며 남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에 대해 질문하면서도 사랑 느끼게 만드는 남이라고 편지 낭독하며 눈을 흘렸습니다. 박순천의 편지 마지막에 는 애랑살을 너는 나라는 글이 적혀 있어 궁금증을 자아냈습니다. 이에 대해 박순천은 남편이 연 시절에 쑥스러움이 많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직접는 너를 사랑해는 말을 하지 못해 거꾸로 적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박순천은 2011년 1월에 가들에게 다가온 어려움과 남편의 암투 사실을 최로 언급했습니다. 그녀는 10년 전인 2011년에 장염인 줄 알고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로부터 암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처음으로 아미는 말을 듣고 화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하며 자신이 관리를 잘못해서 남편이 아매 걸 것 같다는 생각에 되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절망의 순간에 가장 힘을 주었던 것은 가족들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박순천은 암선고 후의 남편이 온갖 딸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갈 거라는 생각만으로 힘시간을 견뎌냈다고 하며 수술 날짜를 잡고 가장 먼저 딸과 아들의 방을 예쁘게 정리하서 차분하게 둘이서 시간을 보냈다고 전했습니다. 앞으로도 박순희 건강하시 좋은 연기를 계속해서 보여주길 바라며 이번 영상 여기까지입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의견을 남겨주세요.
그럼 다음 시간에 또 만납시다 방송 삼 사에서 연말에 시상하는 연기 대상을 무려 7번이나 수상한 고두심 씨는 대한민국의 배우들 중에서 방송 삼 사와 백상예술대상에서 모두 대상을 수상한 유일한 배우입니다. 예전에는 미오사 광고 모델로 무려 17년 동안 활약했던 그녀는 회사 이름이 대상 주식회사여서 대상관은 어쨌든 기록에 증명이 되는 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연기력에 지녔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노년이 된 지금까지 연기력으로는 단 한 번도 잡음이 없었던 베테랑 배우입니다. 데뷔 49년 차를 자랑하는 그녀지만 이렇게 잘 나가는 사람도 아픔이 있다는 것을 보고 역시 모든 인생에는 1호의 낙이 있다는 신뢰를 느끼게 됩니다. 고두심 씨의 과거와 생애를 통해 내 인생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보는 귀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옛날에는 자녀를 좀 많이 아니 아주 많이 낳는 것이 보통이었는데요.
고두심은 칠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으며 대가족이었지만 유복하게 자랐다고 해요. 부친은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총각 시절부터 남태평양 야쿠 섬 등 이런 곳에서 여러 일을 10년 정도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다가 제주도로 잠깐 와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고 어머니를 데리고 다시 아부섬에 거주하며 또 다시 10년간 돈을 벌어 돈으로 제주도 땅을 사서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직업군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땅을 기반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바다를 기반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고두심 가족은 농새란 집안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바다의 크기 인연이 없었고 어렸을 때 물에 빠진 기억이 있어 오히려 물을 무서워하였습니다. 고두심은 제주도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요.
6년 동안 미소 고전무용을 배웠고 학교 대표 예술대회에서도 대표로 나가며 상을 받기도 했고 그 정도로 무용의 재능이 많았으며 웅변대회에도 참가하며 뛰어난 말솜씨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밴드브로도 활약하여 소국을 치기도 했고 이런 다양한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제주도를 대표한 인물로 뽑혀 사람 앞에 나서는 일이 많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그리고 막연하게 배우의 꿈을 품고 있었다고 해요.
그리고 제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구두 우승 때까지 무용을 잘하여 서울의 모델 예술고등학교 무용 특기생으로 입학할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녀의 춤에 대해 엄격한 반대가 있었고, 제주 풍습으로 찬양하는 것도 있어서 더욱 부모님이 심하게 반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묘안을 짜내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구두 우승 때까지 무용을 잘하여 예술고등학교에 무용 특기로 입학을 할 저로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는데.
이를 위해 제주에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구두 우승 때까지 무용을 잘해서 예술고등학교 무용과에 입학하게 되었지만 당시 제주 풍습과 관습으로 찬양하는 것들로 인해 부모님의 엄격한 반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묘안을 짜내어 서울로 올라온 그녀는 대학 강의도 3년 오빠의 밥을 해주겠다는 것을 조건으로 주어 그제야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올라왔습니다.
서울에 올라온 후에는 작은 중소기업 무역회사에 취직해서 미쓰고 로비서 급사 격리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며 4년간 근무했습니다. 하지만 원래의 꿈인 배우의 길을 잊지 못하고 있었던 그녀는 1972년 22살 때 MBC 공채 탤런트 시험에 지원해서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자식 공채 오기 전체 일 등으로 입사하여 동기로는 한인수 현석 이 개인 박정수 김정아 등이 있으며 구두 신보다 한 살 적지만 절대로 동기들이 누나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MBC 입사 5년 차인 1972년 수사반장의 단역으로 출연하게 된 고두심은 처음으로 대본 리딩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기라성 같은 연기자들 앞에서 사시나무처럼 떨면서도 도저히 못 하겠다고 생각하여 강습을 꼬집고 나갔습니다.
현장을 몰래 지켜보던 동기들이 무슨 소리냐 다시 들어가 할 수 있다고 해라며 밀어서 다시 들어가 간신히 해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순수했다고 하며 고두심은 이 기억을 오고도 심 씨는 기억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가까스로 드라마에서 떠밀려나며 성공하지 못하고 무력감만 전전하던 10년 동안 연기를 포기하고 탤런트가 되기 전에 근무했던 회사에 재입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고두심을 아깝게 여긴 드라마 제작부에게 연락을 받아 갈 때라는 작품으로 화려하게 복구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연기를 잘하게 되었을까요? 물론 타고난 끼도 있었지만 큰 계기가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직업적인 공대 뺏기가 있었는데, 그때 드라마 정할대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남편은 미국으로 먼저 갔고 구두심은 시어머니와 부산에서 함께 지냈는데요. 그러면서 시어머니가 너무 잘 먹여서 살이 많이 올랐다고 합니다.
그때 고두심은 카메라에 비추어 보니 너무 부하게 나오는 것을 알고 하루아침에 주인공 교체된 술을 겪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주인공은 유명한 남정임 씨로 주인공 남정임의 동료로 순식간에 배역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을 집중 촬영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속에서 불이 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남정임에게 스캔들이 터져 다시 고두심에게 두 번째 기회가 왔습니다.
1970년대 일반 삽화 광고에서도 나이가 30살이라는 적은 지원 우아키스 신까지 있는 내일로 영화를 찍은 것이 있는데요. 그것도 무려 나이가 33살인데 적은 지원 오아키스 팀까지 있는 내일로 영화를 찍었습니다. 고두심은 일반적인 배우로서는 국민들의 좋은 엄마 역할을 맡아왔지만 정작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엄마가 필요한 시기에 함께 주지 못한 것이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것도 그녀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는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남편의 두 번째 사업 실패로 인해 자신에게 남아있던 모든 것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린 남편의 모습을 보는 것이 힘들었고 그런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힘들어서 이별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송승환의 원더풀 라이플에서 고두심은 인터뷰를 했는데 송승환이 놀라운 증언을 했습니다.
1990 미년 MBC 드라마 분노의 왕국이라는 드라마 시리즈에서 같이 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 속초에 야외 촬영을 하러 가서 밤 촬영을 기다리는데 버스 안에서 홀로 보이지 않는 사랑을 막 부르는 것을 송승환이 우연히 목격하고 아주 강한 인상을 저분이 사랑이 굶주렸던 나 당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고도심이 화통하게 웃으면서 강하게 긍정을 했는데요.
저분이 사랑의 구축함에 다 뵙습니다. 어떻게 더 올 줄 생각을 해야 그 장면이 상상이 되면서 고두심의 사랑이 굉장히 느껴졌습니다. 고두심은 국민에게 사랑받고 있지만 정작 그때는 남편과 이혼하지도 않은 상태였는데 그때의 쓸쓸한 심정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아마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것도 그녀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는 사건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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