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라는 노래로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얻었던 문주란 씨 문주란 씨가 부르는 이 노래가 더욱 와닿는 이유가 있죠. 문주란 씨는 스캔들의 여왕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가수 남진 씨와도 떠들썩한 스캔들이 있었고, 평생을 괴롭힌 유부남과의 만남 등 숱한 루머의 주인공이었습니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진정한 사랑을 준 단 한사람이 있었는데요. 그가 죽은 후 문주란 씨는 뜨거운 후회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요? 또한 그녀가 사실과 다르다며 특히 강하게 항의하는 것 2가지가 있는데요. 그것 또한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인생은 실패작이에요.
가요사의 한 페이지에 남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슬픈 사람 문주란 씨는 부산에서 큰 운수사업을 하는 아버지의 5달 중 막내로 태어나 어렸을 때는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났습니다. 본명이 문필연 또는 문필연이라고도 하는데요. 아들을 더 선호했던 시절 더이상 딸은 필요하지 않다라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라고 해요. 문주란 씨 다음에 다행히 남동생이 태어났다고는 합니다. 하지만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미래를 암시하죠. 그녀는 성장 과정 내내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특히 어머니의 사랑을 그 이유는 어머니가 문주란 씨가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인데요. 여기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차차 말씀드릴게요.
자 그런데 문주란 씨는 어떻게 가수가 되었을까요? 문주란 씨의 아버지는 평상시에 레코드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고 노래도 잘하셨다고 해요. 또 언니들도 다 노래를 잘해서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하죠. 문주란 씨가 중학교 2학년 때 그녀의 노래 실력을 알고있던 친구들이 몰래 노래 경연대회에 그녀를 추천해서 문주란 씨는 어느 날 갑자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고 6주 연속 1등을 하며 입소문이 나게 되었습니다. 노래를 잘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린아이가 어른 목소리를 냈기 때문인데요. 잠시 뒤에 그 당시 목소리를 들려드릴 텐데 들어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결국 그녀는 다음 해인 1966년 동숙의 노래 라는 노래로 데뷔를 하게 돼요. 많은 자료에서 데뷔 당시 그녀가 18살이라고 나오는데요.
사실은 만으로 14살이었고 겨우 중학교 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너무나 어린 나이라 데뷔할 때 나이를 속인 거죠. 그리고 태어난 해도 1949년생이라고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요. 1951년생이라고 합니다. 이걸 바로잡아 달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했어요. 자 그건 그렇고 문주란 씨는 데뷔하자마자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의 놀라운 목소리와 깊은 감수성이 있었는데요. 일단 동숙의 노래를 들어보시죠. 이 목소리가 14살 소녀의 목소리라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그리고 이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깊은 감성은 불행한 가정 환경에서 오는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도 서러운데 아버지는 여자를 무척 좋아하는 분이셨나 봐요.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장가를 3번이나 더 들 정도였고 게다가 작은 마누라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문주란 씨는 아버지가 친어머니 속을 썩이지 않고 잘 해 주셨더라면 어머니가 좀더 오래 사실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문주란 씨는 어머니의 사랑을 평생 그리워했는데요. 친어머니의 사랑뿐만 아니라 3번이나 장가를 가신 아버지 덕분에 새어머니의 보살핌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이죠. 또한 작은 마누라도 많았다는 것은 유부남이면서도 다른 여자들을 만났다는 것인데 부모의 잘못은 자식이나 손자 때 그 대가를 치른다는 얘기가 있는데요. 그 업보가 얼마 가지 않아 딸의 인생에서 드러나고 맙니다.
딸 문주란 씨의 인생을 평생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고 말죠 데뷔한 다음 해인 1967년 돌지 않은 풍차도 계속해서 히트하게 됩니다. 1960년대는 티비 보급놀이 나가고 라디오가 성공했던 시대였는데요. 문주라 씨의 목소리만 들은 사람들은 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해요.
동숙의 노래는 이미자 씨의 동백 아가씨라는 불후의 명곡을 만든 작곡가 배경호 씨가 만들어 준 노래였는데요. 그는 지구 레코드사 전속 작곡가였는데 거기에는 또 1명의 거목이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나라 가요계의 거장 박춘석 씨였어요. 문주란 씨는 박춘석씨의 곡을 받으며 수많은 히트곡들을 탄생시켰습니다. 쉽게 말하면 온조 아이돌이었고 요새로 치면 아이유급이었던 것이죠.
문주란 씨는 10대 때 이미 톱 가수가 되었습니다. 타인들이란 노래는 그녀가 박춘석 씨에게 처음 받은 곡이기도 하죠. 저와는 사뭇 다른데요. 지금은 너무나 센 언니처럼 보이는데 이때는 너무나 청순하고 순해보이죠. 특히 그녀는 60~70년대를 풍미했던 박춘석 사단의 일원이었는데요. 박춘석 사단에는 패티김 이미자 남진 그리고 문주란 씨 이렇게 4명이었구요. 늘 그들은 거의 함께 했고 노래마저 1곡을 가지고 같이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중에 막내가 문주란 씨였는데 혜성까지 등장한 문주란 씨는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남진씨와 함께 영화를 찍기도 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남진 씨와 문주란 씨가 대대적인 스캔들이 일어나요? 그때도 문주란 씨는 아직 10대 소녀에 불과한 19살이었습니다.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에게 쏟아지는 근거 없는 스캔들을 그녀는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또한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불과했던 소년은 치열하고 비리가 난무했던 그 당시 연예계도 참기가 어려웠고 자기 생활 하나 없이 어디론가 끌려가 늘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도 싫었고 연예인으로 살기 위한 각종 얽매임도 그녀의 목을 조여왔습니다. 더구나 가족도 그녀의 안식처가 되지 못했어요. 급기야 그녀는 약을 모으기 시작했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이때는 그 남자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고 강조하더라구요. 아직 그 남자를 만나기도 전이라고 합니다. 많은 자료에서 실연의 상처 때문에 이런 극단적인 시도를 했다고 나오는데요.
그게 아니었던 것이죠. 19살 때 그 내가 음독 사건이 있었잖아. 그땐 난 이성인 남자라곤 남자도 몰랐을 때야 솔직한 얘기로 에구 후 청년을 만나기 전인가 아니라니까 이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물을 너무나 많이 먹어서 무려 보름 만에 깨어났다고 해요. 다른 방송에서는 20일만에 깨어났다는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간신히 살아났으나 살아나도 현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계속해서 세상을 떠나기 위해 각종 끔찍한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를 막내딸처럼 예뻐하던 박춘석 씨가 그녀를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 정신병원에 넣어버리고 말았어요. 정신병원에 들어가니 진짜 미칠 것 같았다고 해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빌고 또 빌어 열흘 정도 만에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황폐한 정신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을 때 첫사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212살 때쯤 어느 날 대구 공연을 갔다가 만났다고 하죠. 그런데 참 비극적이게도 많고 많은 남자들 중에서 하필이면 첫사랑은 유부남이었습니다. 사실을 알게 된 그의 부인과 부인이 데리고 온 부녀자 등 5명에 의해 문주란 씨는 대낮에 방송국 앞에서 끌려가는 수모를 겪기도 합니다. 당시 대한민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명 문주란 사건 있죠. 우리나라 최고의 톱 가수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남자를 만났을까요? 이게 아버지의 업보라는 말 외에 뭐로 더 설명할 수 있을까요? 문주란 씨가 정서적으로 안정된 가정에서 자라났다면 이 남자에게 그렇게 오랜 기간 수년 동안 빠질 수가 있었을까요?
문주란 씨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단 1번도 받아보지 못했고 아버지는 재능은 물려주셨지만 자신은 자유분방하게 살면서 자식들에게는 엄하기만 했다고 합니다. 또한 친형제자매들과 사이도 좋지 않아서 지금은 왕래도 하지 않고 산다는 말까지 비친 적이 있어요. 그녀는 너무나 외로운 아이로 자라났고 주위에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자 그렇게 정신없이 빠져버린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를 어떻게 기억할까요? 그 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1번 갔다가 돌아오더라도 1남자와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그런 여자의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자기는 여자로서의 인생은 실패했다 라고 말하며 후회하는 모습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더욱 후회할 만한 스디슨 마지막 결말도 있었죠.
세월이 흘러 문주란 씨가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마치고 객석을 돌면서 인사를 드리고 있는데, 거기에 그 남자가 떡하니 앉아있었다고 합니다. 문주란 씨를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고 해요. 어떤 여자와 함께 왔다고 하는데요. 부인의 얼굴을 알고 있는 문주란 씨가 어떤 여자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부인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자기를 보고 굉장히 당황해하고 미안해 하는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딱 한번 봤네 와를 찾아온 게 아니라 여자를 하나 데리고 왔더라고. 이제 노래를 딱 끝나고 나면은 객석에 1바퀴 돌잖아. 오셔서 감사합니다. 오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인사를 한다고 떡 하면 앉아있는 거야. 되게 당황을 하는 거야. 미안해하고 이런 식으로 참담한 심정이 들었을까요? 이렇게 그녀는 20대 초반에 만난 첫사랑 이후 70이 넘은 지금까지 독신으로 지내고 있죠. 그런데 남자 문제뿐만 아니라 시련은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23살이 되던 1972년에는 서울시민회관 지금으로 치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준비하던 중 큰 화재가 났는데 누군가 뒤에서 밀어 2층 창문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화마를 피하기는 했지만, 척추를 크게 다쳐 4개월간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신경을 다치진 않아 이만하다고 하죠. 1986년에는 교통사고를 당해서 무척 크게 다쳤는데요. 무려 1년 정도 병원에 입원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차츰 활동이 주춤하게 되었어요. 1993년에는 아이를 가수 생활을 접고 사업을 했는데 음식물 쓰레기 처리사업이었다고 해요. 지금이면 딱인데 너무 시대를 앞서갔죠 사업에 실패하고 2년 만에 지금까지 벌었던 모든 돈을 잃고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부도 후에 빚을 갚지 못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요.
생전 처음으로 6개월간 원룸 생활을 한 적도 있다고 해요. 하지만 2년 만에 빚을 모두 청산했다고 합니다. 말하기는 쉬워도 그 당시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 당시 나쁜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해요. 그 후 또 다시 사업을 벌입니다. 1999년부터 20년 정도 경기도 청평에서 라이브 카페를 운영했어요. 돈은 벌었지만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상처를 받았고 스트레스도 많이 쌓였던 것 같습니다. 정말 아주 힘들었어요. 결국 사업을 접고 경기도 청평해서 400평대의 카페 겸 전원주택에서 살다가 서울 아파트로 이사와서 마음이 굉장히 편하다고 합니다. 다시는 사업을 안 한다고 하구요. 빚만 없어도 감사하며 산다고 이렇게 많은 시련을 겪고 불행한 개인사였지만 그녀를 절대 포기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사랑해 준 단 1명의 남자가 있었죠. 바로 박춘석 씨였습니다.
박춘석씨의 문주란 씨에 대한 애정은 대단해서 문주란 씨를 패티김 이미자 씨보다 더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고 해요. 그런데 잘못된 사랑으로 인생을 망친 거나 다름이 없었는데요. 박춘석 씨는 그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문주란 씨는 박춘석씨를 아버지처럼 따랐지만 그의 말을 잘 듣지 않은 말썽꾸러기였다고 해요. 그녀는 너무나 연예계 생활에 지친 나머지 자기를 모르는 곳으로 한때 외국으로 이민을 가려고 했는데요. 박춘석씨가 이 곡 1곡만 부르고 가라고 하면서 공항의 이별이라는 곡을 만들어 줍니다. 무려 6개의 공학 시리즈의 노래가 나왔어요.
그 정도로 박춘석씨는 문주란 씨를 아꼈는데 박춘석씨는 1994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무려 16년간 투병하다가 2010년 타계하셨는데요. 별새 전에 문주란 씨가 보고 싶으셨는지 거동도 불편한 그가 휠체어를 타고 그녀가 하는 카페에 예고도 없이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카페는 박춘석 선생님이 젊었을 적 이미자 남진 씨 등과 찍었던 추억의 사진들이 있었는데, 그 사진을 보고 선생님이 갑자기 눈물을 터뜨렸어요. 뇌졸중으로 자기가 얼마나 크게 우는지 감이 없었던 그는 엄청나게 큰 소리로 울었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관객들 모두 함께 따라 울었다고 합니다. 이 자식이나 이렇게 남진 씨 찍었던 사진이 있어요. 그 보시더니, 막 우시는 거야.
근데 선생님이 말씀을 못 하시니까 이가 어느 만큼의 큰소리로 우는지 그거를 감각을 몰라요. 워낙 크게 우니깐 객석에 다 알 거 아니에요. 근데 그날 객석에 오신 분들이 다 울었어요. 그날 문주란 씨는 박춘석씨의 곡들로만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 부르는 문주란 씨도 울었고 다 같이 울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게 살아생전 마지막 만남이라고 합니다. 그 후 2년 뒤 돌아가셨다고 아 그의 울음에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얼마나 많은 감정을 서로 교류했을까요? 박춘석 씨가 하늘나라에서도 아름다운 음악에 둘러싸여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기원해 봅니다. 문주란 씨는 박춘석씨의 사랑을 잊지 말고 그가 특히 좋아했다고 하는 파란 이별의 글씨처럼 아름다운 노래들을 널리 알려주시면서 행복하게 살아 가신다면 그게 바로 그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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